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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Aug 25. 2017

그 테이블

영화 <더 테이블>




 이제와 밝히는 말이지만,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골라보자면 자본주의 향이 나며, 격하게 때려 부수는 영화를 좋아한다. 보고 나오면 쉽게 털어지는 액션 영화를 제일로 친다. 한 장소에 앉아 누군가 들이붓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벅찰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도를 조절해 소화할 수 있는 책이 더 내 체질에 맞는다.


 공짜 영화에 눈이 멀어 영화에 관한 글이라곤 태어나 하나 쓴 글을 보냈는데, 초대되어버리고 말았다. 일개 강냉이로 버스 타고 삼십 분 거리에 영화관이 있는 나인데 무려 누군가의 ‘초대’라니, 얼떨떨하고 좋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태어나 두 번째로 써보는 영화 이야기이다. 심지어,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면 누군가 나에게 어떠한 대가로 글을 바란 건 편지와 숙제 이외에 처음이다. 신기한 마음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폭탄 같은 이야기를 여러 개 해버렸지만, 이렇게라도 주절거려야 좀 영화 이야기를 시작할 맘이 드는 걸 어쩌겠슈.


 나 같은 나부랭이를 초대한 무비 패스에게 여러모로 심심한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를 볼 때 깊은 생각이란 것을 하며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이번이 살며 몇 안 되는 그 경험 중 하나란 것이다. 공짜가 무섭다고, 그만큼 밥값을 해야 할 것 같아, 무엇을 기억에 남길지 생각이란 걸 하며 보았다. 낯설었고, 재밌었고, 어렵다.      





 메일이 왔을 때, 나의 유미 여신이 나온단 것만 보고 덜컥 신청을 했다. 그 말은 고로 영화에 대한 아무 사전 정보가 없었단 뜻이다. 제목만 봤을 땐 음식 이야기일까 싶었다. 감독이 쓴 글이 있길래, 혹시라도 스포일러가 있을까 가는 눈을 뜨고 본 것이 전부다. 그러다 재밌어서 다른 글도 읽었다. 사는 동네, 골목의 표정을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 가장 큰 관심사가 내가 사는 강틀랜드, 일상의 맨얼굴 같은 것인데, 그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가구를 통해 듣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벌써 이년이 지났지만, 나는 가구를 공부했다. 원서를 내자던 미술학원 선생님에게 제가 목수가 되려고 이 고생을 하는 줄 아냐고 물었고, 4년간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는 목수였다. 그래서 아마 또래 친구들보다는 가구에 대해 한번쯤은 더 생각해 봤을 것이라 믿는다(아주 아마?). 원래 무언가에 대해 배울 때,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등록금을 콸콸 쏟아부은 엄마 아빠의 눈초리가 느껴지지만,  가구는 정말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느낀 점은 가구엔 이야기가 쌓인다는 점이다. 모든 가구가 그러하진 않지만 그런 가구가 가끔 있고, 가끔 있는 그런 게 어쨌든 살아남는다. 10살 때부터 침대 맡을 지켜온 스탠드, 엄마의 혼수품 서랍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걔네를 볼 때마다 묻어둔 살구 씨가 빗물에 씻겨 드러나듯 기억이 밀려온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가구를 만들고 싶었다.           


 일 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함께 해온 교수님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인데, 가구 디자이너고, 정말 많이 배웠고 아직도 그렇다. 그분이 해준 이야기가 있다. 영국에서 공부하며 부러웠던 것이 가족 대대로 물려주는 가구가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가 가구에 기대하는 것이 기능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은 잊더라도, 가구는 조용히 기억한다. 말없이 이야기가 쌓이면, 어떤 가구는 특별해진다.      


 꼭 가구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어떤 사물들에 흘려진다. 흘릴 땐 몰랐지만, 지나고 나면 그 사물들로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그런 사물들을 줍는다. 동화처럼 눈이 내리던 할슈타트를 기억하게 하는 젖은 어그 부츠와 체크무늬 식탁보, 5리라를 내고 타던 배에서 레고로 만든 것처럼 보이던 해안선, 특별히 맛있었던 밥, 지난 계절의 마당.      



 영화에서는 ‘그 테이블’만이 이야기를 머금고, 감독은 ‘그 테이블’을 주인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더 테이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흰 꽃과, 줄어드는 물, 커피가 놓이고 치워지고. 언젠가 ‘그 테이블’을 봤을 때, 헤어진 사람의 찌질함을 확인하는, 지지부진한 지난날의 결말이, 거짓말과 진심이 흐릿해지는, 터져 나오는 진심의 순간들이 생각날 것이다.  





 주인공이 된 테이블과 놓인 꽃은 아주 확대되어 자주 등장한다. 배우들의 얼굴 또한 내가 그렇게 들여다보는 것만큼 가까이에 있다. 뒷모습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스크린 가득 표정이 채워진다. 영화관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주 확대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은, 마치 별것 아닌 우리 일상을 확대해서 보는 이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며 기억하고,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과도 같았다. 카페의 분위기를 다른 소품들로 더 상상하고 싶었는데, 테이블과 꽃만으로 장소를 설명해낸 것도 어울려서 좋았다. 내가 자주 가던 카페로 바꿔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이 영화는 또 다른 면에서 그림과 닮았다.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라는 구성에서 모네의 연작이 생각났다. 수련과 루앙대성당을 몇 번씩 그리면서 작가는 무엇을 발견하려고 했을까. 영화에서의 테이블이 모네에겐 수련이고 루앙 대성당이었나 보다. 모네를 떠올리다가 마침 닮았다 느낀 것은 인상주의이다. 이 영화 또한 각각의 대사 혹은 에피소드보다는 어느 분위기 속의 찰나들을 테이블을 통해 묶어놓은 느낌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독의 글을 다시 읽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스쳐 지나가고 관객들이 단 하나의 인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에겐 아주 잘 전달된 모양이다. 물에 잠긴 흰 꽃송이와 타원형의 긴 테이블 모양의 잔상들이 모여 하나의 인상으로 이 영화가 기억되었다.


 



 예전에 근대문화유산을 모아둔 전시를 본 적이 있다, 광장시장의 발열 의자라던가, 대장장이가 쓰는 스툴 같이 아직 있지만, 곧 사라질 것들의 경계에 있는 가구들을 모아두니 아주 묘했다. 요즘은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도 카톡으로 이야기하고, 전화는 거의 쓰지 않는다. 영화를 보던 중  친구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곧 그러한 경계에서, 유물이 된 낡은 테이블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나의 인상으로 기억되긴 하지만,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요즘들어 현실에서 부쩍 희귀해진 '대화'였다. 핑퐁처럼 주고받아지는 대사들에 영화관 전체가 자주 들썩였다. 다른 설명을 할 수 없으니 대사가 많았는데, 그 덕분에 많이 친절하고 말랑하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발을 힘들게 띄어 혼자 낯선 영화관에 나를 앉혀놓고, 홀로 있을 때 입 꼬리를 꿈적도 안 하는 나를 웃게 하고, 원래 잘 울지만 찔끔 눈물이 고이게 한. 대사의 힘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기대하지 않게 배우와 감독의 인사를 받으며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작년에 일주일 동안 찍었다고 한 말이 내내 두고 신기했다. 물론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다듬었겠지만 일주일이라니, 촬영 현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가능한 단위인지 몰랐다. 앞서 등장한 그 교수님이 왈, 모든 아이디어는 3시간 내에, 작업은 일주일에 하루만 제대로. 더불어 100일 동안 100개의 의자를 만든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바로 터져 나오는 말이 진심인 것처럼, 지금 생각나는 것이 정답일 때가 많다. 정말로 오래 붙잡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닌가 보다. 지금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메모장에 적어둔 몇 가지의 단어들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 써가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짧은 네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 영화며 독립 영화를 잘 모르는 영알못이 보기엔 아주 신선했다. 사람들은 긴 글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신문은 카드 뉴스로 대체되고, 한 문단의 시에 좋아요가 눌리고, 두 시간짜리 예능은 하나의 짤로 소비된다. 이런 세상에서 영화가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한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구성이었다. 요즘 사람들의 의식을 담아내서 영화의 방향에 대해 쉽게 훌쩍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민이, 어떤 고난 속에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지 차마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은 사람에게 기분 좋은 한 터치를 남겼다면, 그래서 내가 다른 새로운 영화에 도전한다면, 그것으로 영화관의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 얘기는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 바가지 해버렸다. 줄거리나 대사, 숏이며 구성, 앵글 같은 영화스러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화 비슷한 얘기는 한 것 같아 공짜 영화를 본 무거운 마음이 그나마 덜어진 듯하다.     


 영화관 안 사람들이 다 같은 ‘그 테이블’ 앞에 앉을 수 있게 해 준 여러 수고들을 상상해본다. 쉽게 걸어 들어왔지만, 들어온 발걸음만큼 가볍게 사라지진 않을 영화임은 분명하다. 영화를 본 다음날, 마주친 익숙한 것들에게서 이야기를 읽어내려 애쓴 나를 보았으니까. 하나의 대답을 들고, 한 가지 태도를 배우며, 십몇 년째 지긋지긋하게 나와 함께한 이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집어 들지도 않았던 단편 소설과 다른 영화도 봐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테이블에 쌓일 내 하루들을 기념하며,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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