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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Nov 28. 2017

장태산 나들이

I'm dreaming on a Brown Christmas


Intro.     


춥고 긴 겨울의 시작이다. 

이제 더 추워지면 산책 못해, 마지막 단풍이야를 외친 지 몇 달째. 미미, 미룸의 미학을 실천하며 겨울을 최대한 미뤄본다. 패딩을 최대한 안 사고 버티는 이상한 결정 장애의 발생, 전기장판 미루기(그러면서 수면잠옷 두 겹씩 챙겨 입기), 내복 안 입기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마당이 온통 하얗다. 


어제 도서관 창문 밖의 갈대밭으로 맛있어 보이는 폭신한 눈송이가 내리더니 오늘은 어느 겨울의 하루처럼, 암막커튼 밖의 하얀 세상에 눈이 부신다. 저번 주에 가을의 끝을 잡으러 다녀온 산책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겨울이다.      






1. 

내가 마지막으로 가을을 목격한 곳은, I'm dreaming on a Brown Christmas, 햇볕을 머금은 눈이 내린 장태산이다.     


장태산은 한 개인이 이백 억을 들여 만든 휴양림으로, 경매에 넘어갔던 걸 대전시가 다시 사들여 꾸몄다. 예전에 세 식구가, 세 집에서 살 적에, 엄마가 언젠가 우리 같이 와서 커피 마실 일 있겠지, 했던 곳. 일요일 아침, 한 집에서 일어난 우리는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를 챙겨 장태산으로 향했다.       



2.

가자마자 보인 것은 고개가 뻐근하게 턱을 들어야 그 끝이 보이는 뾰족한 메타세콰이아 나무였다. 나무젓가락에 설탕가루를 휘휘 감아 만들다가 통통해지기 전에 전해준 솜사탕같이 생겼다. 어쩌면 한국 정서에 낯선 나무 같다. 우리나라의 정원을 보다가, 중국의 여러 층짜리 누각을 봤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메타세콰이아는 화석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제는 지구에 없는 줄 알았는데, 중국 산림청 직원이 우연히 발견하여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발견되어 이렇게 퍼지기까지 채 70년도 되지 않았다. 공룡과 함께 지구를 정복했던 나무는 지금 이렇게 가로수로 남아있다.      


아기 나무를 기르기 위해 열매를 모으는지, 다 수거한 뒤라 길가에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열매를 구경할 수 있었다. 모양이 솔방울과 비슷한데, 더 동그랗고 국화 꽃송이를 닮았다. 아니면 양파 튀김 모양, 혹은 며칠 전에 먹은 밀푀유 나베처럼 생겼다. 잎은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줄이면 된다. 가시 같은 잎사귀들이 곧은 선을 따라 차례대로 달려있다. 마르고 길쭉하다.      


3.

만들다만 솜사탕이 감긴 나무젓가락이 둘레에 꾹꾹 꼽혀있는 호수. 다리를 경계로 해가 드는 쪽의 절반은 얼음이고 절반은 물이 졸졸 흘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릇했을 잎들은 차분하게 빛바래 우수수 호수에 부어 있었다. 호수가 거대한 대접 같았다. 큰 수저로 살얼음을 깨서 퍽퍽 떠먹고 싶었다. 아삭한 바람 맛이 입에 고인다.      

호수 위뿐 아니라 데크의 나뭇결마다 틈틈이 잎이 가득했다. 걸으면 아직은 시원한 바람이 불 때 마다 여기저기로 갈색 잎이 눈처럼 내렸다. 메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푸른 주목 나무 위에도 토핑처럼 내린 갈색 잎들. 주목 컵 케이크를 한입에 쏙 넣고 싶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보이는 것마다 다 먹을 것 같았다.   

   


4.

장태산은 등산을 위한 산이라기엔 아기자기한 편이고, 산책이라기엔 조금 숨 가쁜 정도다. 산에만 가면 왜 이렇게 뭔가를 먹고 싶은지, 입맛이 돈다. 떠올려보면 그 시작은 수능이 끝난 직후에 있다. 하릴없고 세상에서 가장 아무 생각 없던 우리는 무지막지하게 무언가를 먹어댔는데, 먹기 위해 배가 고파야 하고 기운을 소진해야 한다는 이유로, 등산을 자주 다녔다. 조금 높은 동네 뒷산이 주 무대였다, 애들이랑 어그부츠 신고 목도리 두르고 귀마개하고 슬슬 언덕을 올랐다. 그러다 보면 딱 봐도 땟국물 흐르는 어린애들이 슬렁슬렁 등산을 온 게 귀엽고 기특했는지, 어른들이 그렇게 먹을 것을 주었다. 벤치에 앉아 만담을 펼치면, 가방에 넣어 오신 오이, 사과, 바나나 등이 자연스럽게 손에 들려있었다. 우리는 그걸 낼름낼름 잘도 먹었다. 겨우내 우리는 도저히 먹을 것은 없을 것 같은 그 산에서 각종 과일을 비롯한 시루떡과 편육, 막걸리 등을 얻어먹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등산은 항상 먹을 기억을 동반한다. 그래서 동네 언덕 같은 산책길일지라도, 나무 사이를 걸을 때면 입맛이 도나보다.      


5. 

사진관을 오래 했던 아빠는 가게를 그만둔 후에는 어딜 가든 절대 카메라를 가져가지도,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 그래도 습관처럼 날다람쥐가 되어 여기저기 둘러보고 기막힌 뷰를 잘 찾아낸다. 그리고 아빠가 한걸음 물러서면 나와 엄마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렇게 찾아낸 장태산의 멋진 곳. 사람도 없이 조용하고, 옆에는 얼어붙어가는 시냇물이 있고, 아직 정오를 향해 달리는 중인 태양이 버티칼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산에만 오면 고이는 침을 달랠 커피를 마셨다. 털 달린 옷만 아니었으면 곳곳에 마련된 길쭉한 의자에 누워 삼림욕을 즐겼을 텐데, 길고양이들 등에서 도깨비 풀을 일일이 골라내는 수고로움을 생각하며 참았다. 마루에 소심하게 앉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초콜릿도 하나 꺼내 물었다.        


6. 

뭐든 감질나게 하면 과한 욕심이 따라온다. 입이 달래진 참에 마침 매점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휴양림 안쪽 산책길에 있던 유일한 매점 같았다. 그래서 빠르게 먹을 것을 스캔했다. 수더분하게 옷을 입은 아저씨가 난로에 가래떡을 굽고 있었다. 정말로 그곳에는 그런 가게와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할 것 만 같다. 시와 성경 구절들이 적힌 판들이 늘어서 있고, 매점 건물은 나무껍질로 덮은 지붕과 나무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 난로가의 아저씨는 빨리 달라는 손님의 요청에 대충 구워 팔 거면 안 팔 거라고 혼을 내셨다. 한참을 기다려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딱 이에 붙지 않을 만큼 쫄깃한 가래떡 구이를 받아 먹을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교수님 교수님 하면서 막걸리에 소주를 삭 까서 먹고 있었다. 아침 열 시였고, 그런 사람들을 몰리게 할 공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7.

겨울을 맞아 휴양림에서는 한창 나무를 돌보는 작업 중이었다. 현수막을 걸고 곳곳을 막아두었다. 작은 마당도 서리가 내리기 무섭게 사부작사부작 나름 바빴는데, 이 곳의 할 일은 얼마나 많을까. 봄 못지않게 들이닥치는 겨울도 대비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나무도 내버려 두면 알아서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키워보니 나무는 정말 너무 쉽게 죽고, 손이 많이 간다. 다음 생에는 국립공원의 소나무로 태어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순간이다. 오래 키워온 사람도 이유를 알 수 없게 멀쩡하다 죽어버리는 것이 나무다. 게다가 메타세콰이아는 클수록 급격히 약해진다고 하니, 각자 이름을 걸 고 있는 이 나무들을 위해 해줘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마르고 속이 비어 죽어버린 가지들을 한 곳에 모아 두었는데, 가지치기가 한창일 때라 위험해서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 둔 구역까지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들어가 사진을 찍고 뛰어다녔다. 정말 마른하늘에서 나뭇가지가 떨어집니다. 그러다 내 친구처럼 손 다쳐요. 나와 밖에 앉아있던 친구는 하늘에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막다가 손이 부러졌다. 정말 거짓말 같이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긴 나뭇가지였다. 진짜다. 나뭇가지는 위험합니다.      



8. 

메타세콰이아 나무도, 매점도 나에게 충격을 주진 못했다. 가장 강렬했던 것은 괴기한 스카이 워크. 철근 빔 구조물로 만들어진 스카이워크는, 40-50미터쯤 되는 메타세콰이아 나무의 중간 부분을 감상하며 걷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주 높았고 아주 컸다. 정말 괴기스러웠다. 발을 내딛는 순간 겨울 산의 칼바람에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걷는 힘에 의해 흔들리는 것인지, 바람 때문인지 몰라서 그냥 빨리 걸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자고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빠는 급격히 조용해지더니 아래에 있겠다고 했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뱅글뱅글 타워를 올라가는데 끼긱 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오기에서 인지 꼭대기까지 올랐는데, 엄마는 이미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고,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건물은 임시 주차장 같이 연약해 보였고, 며칠 전 책장이 출렁이는 지진을 겪은 후라, 임시 주차장 같은 이 건물이 얼마나 말이 안 되게 연약해 보이는지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내려왔다. 맨 땅을 밟자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만약 정말로 나무의 중간 가지를 거닐게 하고 싶었다면 이런 식은 아니다. 장태산의 분위기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은 놀이기구가 필요한 곳이 아니다. 시에서 보수를 하며 만든 것 같은 데, 롤러코스터 타이쿤이었다면 당장 팔아버렸을 것이다.      


9.

열심히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웃기게도 휴양림의 어느 곳만큼 주차장의 풍경이 예뻤다. 바람에 잎사귀들은 날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꾹 찍는 마음으로 갈색의 바닥을 걸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어머 얘, 너 머리카락 색이 나무 색이랑 똑같다고 했다. 나라는 사람도 계절에 따지면 가장 가을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가을이 눈처럼 내려온다.      




Outro.    


어쩔 수 없이 겨울이 찾아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은 것은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우울한 봄과 가을에는 이유 없이 한 번씩 울게 되고,

영혼도 몸도 휩쓸린다. 그러지 않아도 돼서 좋다.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계획을 세우고, 시작을 기다리는 시간들.      


반찬과 나를 함께 담아 시장바닥을 누비고, 쵸코가 20킬로였던 나를 끌었던, 동네 친구들이 다 돌려 탔던, 파란 썰매가 생각난다.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건 4월에도 눈이 오는 제천에서 자란 나의 겨울 사랑 같은 것이다.      


눈 오는 데 사진관 네 왜 안 나오지, 아이고, 사진관 네 나온 거 보니까 이제야 눈이 오는 것 같네 하던 슈퍼 아주머니. 눈 만 내리면 몇 시건, 먹던 밥상을 내팽개치고 미친 듯 뛰어나가서 처음 온 눈에 발자국을 찍었던 우리 가족. 아파트에서도 밖에서 가장 잘 보일 베란다에 우리 동에서 1등으로 트리 설치하기, (떼기 귀찮아서 무려 4년 동안 걸려 있었지만) 거실의 유일한 장식으로 꼬마전구를 걸어두기, 선물 주고받기, 꼭 함께 케이크 먹기 등 우리 가족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겨울을 챙겨 왔다.       


이 집에 처음 왔던 3월. 방에 열심히 페인트를 칠하고 있는데 어느새 고개를 돌려보니 다 하얬다. 그때는 다른 집도, 다른 사람도 없어서 경계 없이 눈이 쌓였다. 과수원의 나무들이 다 트리 같았다. 소리를 지르며 갓 내린 눈을 만끽했었는데, 지금도 눈이 내린다.          


나리는 갈색 눈을 맞은 지 며칠 만에 하얘진 창밖을 보며,

마지막으로 가을을 정리하고 겨울을 준비해 본다. 이제 캐롤을 들을 때다. 

I'm dreaming on a brown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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