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_2018.01.18
겨자가 물어온 꿩
오늘 아침의 시작은 “미치겠다, 진짜. 겨자 너 왜 그래!”, 엄마의 목소리였다. 센서등이 꺼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나가보려 했는데 현관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꿩이었다. 반쯤 살아 있는. 꿩의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방까지 들려왔다. 긴 진동소리인 줄 알았다. 사마귀, 생쥐, 까치를 잡아다 놓았을 때처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겠지.
아빠가 출동해서 치우려고 했지만 고양이들은 여기로 저기로 물고 다니며 숨겨두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크기가 다른 깃털만 줄줄이 남아 있었다. 오후에 보니 뒷집 마당에 고양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신나게 꿩을 먹고 있었다. 아빠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뒷집 할머니는 파란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결국 아빠가 퇴근길에 뒷집 화분 받침대 밑에 숨겨둔 꿩을 찾아 산에 두고 왔다. 또 물어오면 어쩌지. 가릉 거리며 몸을 비비던 고양이들이 말간 얼굴을 하고 들었다 놨다 하며 시체를 먹는 모습이 잔상으로 보인다. 하루 종일 고양이 좀 그만 내다보라고 말하면서도, 나야말로 신경 끊고 싶다 정말로.
겨자의 남매, 후추가 반쯤 먹힌 채로 죽었을 때도, 내가 아는 고양이 중에 가장 멋있는 얼룩이가 홀연히 떠났다 썩지도 않고 발견되었을 때도, 그물에 걸린 고라니에게 뒷발길질 당하며 풀어줬는데 그날 저녁에 결국 죽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엄마는 벌게진 눈으로 있는 힘껏 슬퍼했다. 우느냐고 동물농장을 보지 못하던 나였는데, 나도 내가 낯설었다.
분명 밥을 주던 고양이는 한 마리였는데, 태어나고 죽으면서 여덟 마리가 되었다. 아노는 며칠 꼬질한 채로 밥만 먹으러 오더니 또 임신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 상황은 저녁 식탁의 토론거리로 자주 올라온다. 결론은 에휴, 한숨으로 끝난다. 야생을 야생으로 둬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디까지 다가서고 물러서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울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엄마는 사람으로 인해 생긴 업보라고 생각하자며 고양이들 밥을 계속 주고 있다. 처음 키운 쌈 채소를 고라니가 싹 베어 먹었을 때도, 걔네 땅에 우리가 온 건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뒤숭숭한 하루의 시작에, 도서관에 가서 괜히 가본 적도 없는 종교 쪽을 뒤적였다. 반야심경을 읽었는데, 당연히 아무 상관없는 얘기였고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다음 생에 야생의 동물로 태어날지, 집에서 키워지는 동물로 태어날지 고를 수 있다면, 뭘 택해야 할까. 자유로운 고양이들을 보니, 편히 낮잠 한 번 자기 힘들고 너무 쉽게 스러진다. 애완견이 되자니,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고통스럽거나 외로운 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좋은 주인이 아니었기에, 더 어렵다. 역시, 다음 생에는 국립공원의 소나무로 태어나는 걸로.
겨자야 제발, 어디서 다 먹고 와. 올 땐 입도 닦고. 제발 보은 하지 말아줘. 나도 너 안 보이는 데서 밥 잘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