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_2018.02.21
구구
자기 전에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건조한 코 속을 훑어주고, 쓰리거나 기름진 속을 내려주는 차. 겨울 밤, 다 떨어져 가는 티백을 보니 지난 마당이 그리워진다. 말려서 여기저기 걸어놓을 정도로 방치했던 민트가 아쉽다. 풀리는 날을 보고 냉장고를 뒤져서 씨앗을 찾았다. 꽃 째로 꺾인 게 몇 개 있었다.
주워온 우유 각으로 보석 보관함을 만들고, 요구르트 통으로 요구르트 아주머니를 만들던 기억으로, 아이스크림 통을 색칠했다. 며칠에 걸쳐 잊을 때쯤 마다 젯소를 덧발랐다. 흰 바탕이 마르고, 쪼그려 앉아 쓱쓱 이름을 써 주었다. 이름은 구구. 구구 아이스크림 통이어서.
심은 지 일주일쯤 됐는데, 언제 싹이 날지 매일 닦달한다. 구구야, 일해야지. 어서 나오렴. 엄마가 잔인하다고 했다.
장금이가 생각난다. 돌아가시기 직전인 상궁을 모시게 된 장금이는 죽기 전에 꼭 먹고 싶다는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된다. 어릴 적 오빠랑 먹었던 꼬들꼬들한 쌀이라 해서, 장금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말린 쌀을 가져간다. 상궁은 비슷하지만 이 맛은 아니라고 한다. 장금이는 오랜 시간을 들여 쌀을 말리고, 그걸 먹고 상궁은 눈을 감는다.
텔레비전에 대박집의 비결 이러면서 나오는 걸 보면, 뭘 저렇게까지 해, 정도의 정성이 많다. 만두 속에 들어가는 무말랭이를 당근 데친 물에 삶고, 김밥의 어묵을 꼭 포도즙에 졸이는, 아주 아주 수고로워 보이는 과정들. 사소하고 과장된 것만 같은 단계들이 모여 모든 걸 가른다. 당연하게도 그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 톨의 민트 싹을 틔워내기까지, 한 잔의 차가 나오기까지.
지난봄에, 버스 터미널 앞을 서성이다가 프리지아를 한 단 샀다. 이른 꽃에 설레서 집안 곳곳에 꽂아 두었는데, 꽃망울이 피지 않고 그대로 시들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때에 맞춰 내놓기 위해 온실에 난로를 피운다고 한다. 억지로 맺힌 꽃이라, 피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는 나만이라도 그 꽃을 사지 말아야겠다.
왜 안 하느냐, 누가 보면 혼자 한 줄 알겠다, 하며 엄마와 티격태격하기 바쁘겠지만, 빨리 봄이 되길 기다린다. 아직 무지해서 마당의 꽃들은 겨우 한 송이씩 자란다. 꺾기엔 손이 발발 떨리므로, 좀 더 마당에 두고 보기로 한다.
그리고 잎과 줄기들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