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낡은 즐거움
0526
안녕 친구야.
서울에 다녀 온지 5일 째 인데 5일 동안 몸이 너무 아프다. 옮겨 심은 모종들이 몸살이 걸리듯 이젠 어딜 한 번 다녀오면 이렇게 아플 건지 벌써 지레 겁을 먹게 되네. 하나 둘 걱정만 줄줄이 늘어가나 봐. 병원도 다녀왔고 약도 꼬박꼬박 먹는 중인데 나을 생각을 안 하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아픈 게 너무 낯설어서 나도 엄마도 놀랐어. 이렇게 머리가 멍 하고 기운이 한 톨도 없는 와중에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서 책상에 앉았어.
오늘은 목요일이야. 목요일마다 도서관을 꼭 가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는데 이번 주는 내내 앓느냐고 기운이 없어 가질 못했다. 도서관이 아닌 집에서 목요일 아침을 보내다 보니 어릴 적에 다니던 도서관이 생각나. 그 도서관은 엄청 크고 노란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서, 한 권의 책을 꺼내려면 책장의 끝부터 밀고 밀어야 했던, 그런 도서관이었거든. 그곳의 공기를 떠올리면 코끝에서 종이의 오래된 냄새와 지하 식당에 있던 라면 냄새가 희미하게 번져. 사각사각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숨죽인 발자국 소리도 들려온다. 초등학생 다선이는 그냥 별일 없으면, 초보운전인 엄마 옆자리에서 안전벨트를 꼭 붙잡고 도서관에 가는 거지. 제일 시원하고 제일 따뜻하고 재미있는 것도 제일 많으니까. 앉아서 책도 고르고, 독후감도 쓰고, 방학숙제인 일기도 쓰고 그랬지.
대학에 오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을 썼었는데,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쉽게 손안에 주어지게 되면 힘이 쭉 빠져버리는, 그런 적 있어? 학교 도서관은 때때로 나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어. 어려운 책들이 가득 꽂힌 서가에서 뭐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른 채 괜시리 계단만 오르락내리락. 여기가 어디지, 이마에 땀만 나고. 빈손으로 나오긴 서운해서 힘없이 빌려온 책 두어 권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던 생각도 난다. 과제, 마감, 각주, 어려운 단어들과 나만 모르는 것 같은 작가들.
그러다 이곳에 내려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날들을 보내며 가장 좋은 점은, ‘그냥’ 도서관에 갈 수 있다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책 골목을 누비며, 어떤 이유 없이 그냥 읽고 싶은. 그저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의 느낌만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들지. 아직은 책보다 빈칸이 더 많은 도서관이지만 어릴 적 다니던 도서관이 그랬듯, 무럭무럭 자라서 천장까지 가득한 책꽂이를 가지게 될 거야. 나와 함께 키가 크는 거지.
한 아름 책을 안아든 다음에는 한눈에 반한 자리에 안착! 오른 쪽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큰 창이 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신한 소파가 있는 자리야. 아주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앉아서 뭉근해진 그런 질감으로 안아줘. 그림만 골라보고, 눈이 멈추는 페이지만 읽고 덮어버리고, 글씨의 모양만 눈으로 훑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이, 시계바늘 걷는 줄 모르고 소파에 푹 묻혀 있다가 눈을 들어보면 창밖으로 까치가 총총.
소파에 앉아서 휙휙 종이를 넘길 때면, 잠들기 전 책을 읽던 어린 내가 자연스럽게 스미어 나와. 큰 베게에 기대어 라이언 킹이 새겨진 스탠드를 켜고, 주황색 불 아래서 머리맡에 쌓여있는 책 중에 한권을 골라서 읽는 거지. 읽다가 재미없으면 다른 책을 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거든. 그렇게 갈 수 없는 우주로, 안개가 자욱한 마법세계로, 전화선을 타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여행하는, 보라 빛 마음 그대로 잠이 드는 거야.
잊고만 살았던 그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누리는 이 기쁨은,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되었음을 알게 해. 돌고 돌아 이제야 제대로 출발선에 서게 된 거야.
나는 꿈이 참 많았어. 피아노를 치는 만들기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또 사서가 되고 싶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 도서관이 직장인, 아주 멋있는 직업이 마침 있는 게 운명이다 생각했지. 그러다 그림이 좋아 미술학원에 하루 이틀 다니다 보니 그 꿈과는 조금 멀어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사서는 이루고 싶은 꿈이야.
할머니가 될 무렵 산골자기에 나만의 도서관을 지어놓고,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기약 없이 책을 넉넉히 빌려주는 거야. 기억 속 희미하게, 동화책 속에 그런 할머니가 계셨거든. 어쩌면 할머니가 되기 전에 그런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봐, 여기의 작은 도서관이 얼마나 큰 힘을 나에게 주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도서관의 문을 열고 번쩍번쩍 책을 들어다 놓을 수 있을 것 같이, 새로운, 그리고 또 잊었던 꿈을 꾸게 하잖아. (현실은 이불을 두 개나 덮어야 겨우 잠이 드는 아픈 개미지만.)
책방주인도 되고 싶어. 하루 종일 책을 고르고 진열하고 읽다가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마시고 화분에 물을 주는, 그런 일에 매일을 할애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물론 현실은 절대! 그것뿐이지 만은 않겠지만 말이야.
책을 가까이 하는 요즘, 나는 잊고 살았던 낡은 즐거움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매일 들여다보며 지내. 집에 있는 책들도 나름 내 방식대로 정리해두었어. 언제 한 번 소개할게. 나를 꿈꾸게 했고 또 즐겁게 하는 도서관. 너에게는 어떤 장소가 그런 의미일까? 늘 궁금해. 날씨가 내 건강처럼 우중충하다. 기침이 자꾸 나서 편지는 이만 쓸게. 안녕, 늘 궁금한 나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