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가슴 시린 러브 레터' 연재를 시작하며
너른 이해와 배려로 포근히, 넉넉하게 감싸주길
지난 브런치북 ‘가슴 시린 러브 레터 1~6’은 44~45년 전,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연애 시절에 주고받았던 편지글을 소개했었다. 그 시절의 아름답고 소중했던, 하지만 가난한 연인들의 가슴 시린 20대 청춘 예찬이었다.
이번 브런치북, 'Post-가슴 시린 러브 레터'는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아내로, 우리 두 사람 억척 부부가 되어 지난 42년간 살아오면서 겪은 삶의 이야기를 편지글을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글로 쓰려고 한다.
아마 꿈 많고 아름다웠던 20대 아날로그 감성 소환에 이어서 차츰차츰 성숙해 온 어른의 이야기를 토해낼 것 같다. 그러기에 혹여 독자 여러분에게 꼰대 이미지로 비칠까 싶어 살짝 두려운 마음도 생긴다. 행간(行間) 곳곳의 함축적(含蓄的) 의미에 너른 이해와 배려로 포근히, 넉넉하게 감싸주길 바란다.
요즘 식 나이로 치면 우리 부부는 내가 24세, 아내가 23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나는 몹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섬출신의 7남매 장남이었다. 아내는 원만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정(性情)이 곱고 영민(英敏)해서 더욱 행복했어야 하는데, 하필 나와의 인연으로 굴곡진 삶의 언덕을 힘겹게 오르내려야만 했다. 그래서 항상 내 아내에게 미안하고 가슴 시리다.
당시 우리 부부는 꿈꾸었던 대학교, 원하는 학과를 포기하고 교육대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1979년, 1982에 첫 발령을 받아 40~42년여 초등교원으로 근무했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1, 딸 1을 두었다. 서툰 엄마아빠였지만 제법 성공적으로 가정을 일구려고 무진 애썼다.
되돌아보면, 척박한 우리네 삶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일면(一面)으론 비슷하나 조금은 다른 삶의 모습일 것 같기도 하다. 사랑스러운 두 자녀의 특별함(?), 돈독한 신앙생활, 교사-교감-장학사-장학관-교장으로 이어졌던 꽉 찬 교직 생활, 어쩜 가슴 턱 막혔던 치열한 과거에 이은 현재 진행형 삶은 우리 부부에게 무수히 많은 얘기거릴 던져주었다. 그러기에 꼬오옥 가슴에 담아두었던 생각, 느낌을 서로에게 꾸밈없이 솔직 담백한 언어유희로 표현하여 자발적 위안(慰安)을 받고 싶다.
이제 'Post-가슴 시린 러브 레터'는 똑. 똑. 똑. 독자 여러분의 포근한 마음의 문을 두드려 본다. 지난 수두룩한 우리 부부의 인생 이야기가 담보(擔保)로 잡혀 있으니 독자 여러분에게 차근차근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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