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째 주, 주일날 주일학교(主日學校)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먼저 오신 반사(班師)님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김 선생님, 결혼 축하해요. 저도요.”하는 거였다. “예, 무슨 축하를요. 누가 결혼해요? 제가요?...”
그랬다. 목사님께서 전격적으로 주보(週報)에 우리 두 사람의 결혼 광고를 내셨다.
‘5월 5일, 김경호·정O자 선생님의 결혼식이 본 교회당에서 있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광고에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주일 대 예배 전, 더 많은 성도가 축하의 인사를 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situation)이 있을까?’ 막무가내 황소 목사님께서는결혼식 광고를 힘주어 읽으시며 많은 축하와 격려를 부탁하시니, 이젠머리마저 하얘졌다. ‘이를 어쩌지? 여자 친구 가족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까? 한 달도 안 남겨놓고 결혼할 수 있을까?’ 갑자기 수많은 고민들이 머리 위에 둥둥, 너무 심란스러워 마음이 건공중(乾空中)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목사님 광고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맘껏 가슴 시린 아픔과 고통도 만들어 주었다.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지만,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결혼 준비는? 갖은 반대는 어떻게 물리치지? 내년에 결혼해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 결혼해야 한다면 목사님께서 정해준 날짜대로 강행할까?’라는 이런저런 생각이 끝도 없이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서로 응원하고 긍정 마인드(mind)를 품고 나아가고 싶었다. '벌써 결혼하면 후회할 텐데, 철부지라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이렇게 저렇게 치부했지만, 우리 서로 사랑하니까 사랑의 힘으로 묵묵히 난관을 극복하려고 했다. 물론 주변 지인들의 따뜻한 격려와 축하는 추동력을 갖게 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우린 용감히 결혼했다.
1982년 5월 5일, 목사님 주례로 본 교회당에서 결혼했다. 수많은 감정들이 난무했던 나의 결혼식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생 드라마를 너무 일찍 연출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내 고딩 동창 3인의 신부 들러리였다. 그들은 신부 메이크업(makeup)을 한 후, 하얀 드레스를 붙잡고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며 충장로를 횡단했다. 남자들이 그렇지. 결혼식 예정 시간이 다가오자, 촉박한 시간을 택시 기사님께 책임지라며 과속 질주(?)로 교회당에 도착하게 했다.
후일(後日)에 아내는 ‘정말 내가 철부지였다. 친정 식구들에게 죄송했다. 철저히 나의 농간(弄奸)에 넘어갔다. 목사님께서 광고했으니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라고 했다. 아내의 얘기 중 '철저히 나의 농간에 넘어갔다'라는 표현에 나는 움찔했다. 어쩌면 나는 목사님의 결정을 원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여자 친구와의 결혼에 대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고, 반드시 5월 5일에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처가 식구와 털끝만큼도 타협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던 것 같다. 당시 몹시 가난했던 우리 집 형편이 괴물 같은 나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좌고우면(左顧右眄) 할 시간이나 사치스러운 맘의 여유 따위일랑 일체 다 버리고 오직 하루빨리 결혼해서 함께 돈 벌고 싶었고, 나아가 어려웠던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나에게는 영리하고 마음씨 고운 아내를 내 인생의 환상 파트너로 삼았음이 최고의 행운이었지만, 처가 식구들에게 죄송했고, 아내에게 늘 빚진 마음으로 살아왔다. 또한 일순간이라도 아내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7남매 장남인 나를 지지해 주었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건사해 주었으며, 1남 1녀의 소중한 자녀를 낳아준 아내이기에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아주 돈독한 신앙의 동반자(同伴者), 아내이기에 더욱 감사한다.
이제 결혼 후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계속되는 구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