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배경 학생들도 받아쓰기에서 100점 맞았다
한국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의 받아쓰기는 유쾌한 전쟁(?)이었다.
교사 재직 시, 1학년 담임을 맡으면 으레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3월 한 달 동안, ‘우리들은 1학년’ 과정을 끝내면, 동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받아쓰기 급수 카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미리 받아쓰기할 범위를 정해주었는데, 그 범위 안에서 어떤 낱말·문장을 받아쓰기할 것인지 분명히 알려준 후 다음날 받아쓰기를 했다. 대체로 매일 받아쓰기를 했다. 그런데 1학년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는 점차 공포시험이 되었다. 사교육 기관이나 가정에서 미리 탄탄히 예습해 온 학생들과 받아쓰기를 잘하는 우수 학생들은 100점을 받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한다. 양손에 공책을 받쳐 들고 이마 앞에 확 펼치며, '와, 100점 맞았다!'라고 환호성 지른다. 한두 문제 틀린 친구도 자랑 대열에 참여한다. 하지만 여러 개 틀린 학생은 완전히 풀이 죽어 재빨리 받아쓰기 공책을 가방 속에 넣는다. 큰 잘못을 한 게 아닌데, 안타까워 쪼는 모습이 가관(可觀)이다.
이처럼 한국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는 자기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엄청난 매력이자, 반면에 스트레스(stress) 덩어리 되어 확연히 희비가 엇갈리는 유쾌한 전쟁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학생들이 매일매일 받아쓰기를 하며 어느덧 한글을 익혀간다는 것이다.
이주 배경 학생들과의 받아쓰기는 한국 1학년 학생들의 받아쓰기와 다르다.
그들에게 한국어는 처음 대하는 너무 어려운 외국어이다. 대체로 이주 배경 학생들이 한국어를 익히는 데에 가장 큰 장애 요소는 한국어 노출 기회의 부족이다. 그들은 학교생활에서의 한국어 노출 기회 외에는 학교 밖 한국어 노출 기회는 거의 없다. 그나마 다문화가정에서 아버지·어머니 중 한 분이라도 한국인이면 다행이지만, 부모 모두가 외국인 가정의 자녀일 경우에는 한국어 가정 학습 조력은 아예 없다. 그러기에 이주 배경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는 너무 어렵다.
받아쓰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어 낱말 관련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낱말 익히는 단계를 고려하여 자음·모음 낱말 카드, 받침 없는 글자 낱말 카드, 쉬운 받침 글자 낱말 카드, 그림 카드, 게임용 카드 등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낱말 카드를 보여 주며 교사가 읽은 후 학생이 따라 읽기, 자석 칠판을 활용하여 낱말 카드 지도하기, 구체물과 낱말 매칭(matching) 지도하기, 소리의 고저(高低)를 활용한 낱말 지도하기, 신체를 활용한 낱말 지도하기, 매체를 활용한 낱말 게임지도하기, 낱말 카드 게임을 활용하여 낱말 지도하기, 춤추며 즐겁게 낱말 지도하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낱말 지도가 끝나면 낱말 말하기, 읽기, 쓰기 지도를 했다.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혼자 말하기/친구에게 말하기/선생님에게 말하기/모두에게 말하기), 읽고(혼자 읽기/친구 따라 읽기/모두 함께 읽기), 쓰기(허공에다 손글씨 쓰기/칠판에다 쓰기/공책에다 쓰기)를 반복하게 했다. 비록 이주 배경 학생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고, 서툴지라도 매일 꾸준히 반복 학습했다.
받아쓰기 전 단계로 다양하게 낱말 지도(말하기·읽기·쓰기)를 했지만, 교사가 불러주는 낱말을 학생들이 공책에 바로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학생들 모두 칠판 앞으로 나오게 하여 칠판에다 받아쓰기 연습을 했다. 10명 정도 아이들이 칠판 위에다 직접 받아쓰기를 하면 자연스레 옆 사람이 쓴 글씨를 보고 쓰게 된다. 이때 아이들은 틀림없이 내 옆 사람이 나보다 한국어 받아쓰기를 잘한다고 착각하고, 모른 낱말이나 헷갈리는 단어는 옆 사람 글씨를 보고 쓴다. 이때 한국어를 잘한다고 여겨지는 한 친구가 글씨를 틀리게 쓰면, 다른 학생들은 틀린 줄도 모르고 일제히 그대로 보고 쓴다. 당연히 학생들은 모두 틀리고 만다. 틀린 글씨인 줄도 모르고, 틀린 글씨를 그대로 보고 쓰는 이주 배경 학생의 평화로운 받아쓰기(?)를 보며, 나는 이내 돌아서서 입을 가리고 킥킥 웃는다.
학생들의 낱말 인지 능력, 글씨 쓰는 능력을 확인하면서 오류 빈도가 높은 낱말은 낱말 카드를 슬쩍 보여 주며 쓰게 했다. 학생들은 "선생님, 안 보여요. 너무 빨라요. 칠판에 붙여 주세요."라고 말하며 받아쓰기를 즐겼다. 이처럼 이주 배경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는 한글을 익히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학생들은 즐겁게 받아쓰기하면서, 반복해서 받아쓰기하면서, 매일 받아쓰기하면서 서서히 한글을 익혀 나갔다. 더디지만 한글 익히기를 단계적으로 확장해 나가며 끊임없이 계속 반복하다 보니, 제법 한글을 쓴다. 그리고 매일 받아쓰기할 때 반복적으로 제시해 준 낱말은 '학교 이름, 나·너·우리, 아버지·어머니, 오빠·누나,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등이었다. 교사는 학생들이 즐겁게 받아쓰기하도록 춤추며 열정적으로 낱말을 불러주었다. 낱말을 틀리게 쓰면 힌트(hint)를 주고, 보여주고, 고쳐주고, 칭찬하며 격려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주 배경 학생들은 받아쓰기 시간을 좋아했고, 기다렸고, 성공적으로 받아쓰기를 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드디어 이주 배경 학생들도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
그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한국 학생들과 똑같았다. 비록 한국 학생들과 달리 평화로운 받아쓰기를 했지만, 결국 받아쓰기를 통해 서서히 한글을 익혀갔다. 어쩌면 그들은 받아쓰기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한국어를 익혀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점점 한국어를 잘하는 이주 배경 학생들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비록 더디게, 어렵게 받아쓰기 100점을 맞았지만, 이주 배경 학생들은 능력 있는 한국인이 되어 100점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것 같았다. 희망찬 미래를 이끌어 갈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한, 나는 오늘도 묵묵히 한국어 교원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