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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글사랑이 거봉
Nov 15. 2024
독립한 아들을 보며
홀로서기
아들의 원룸을 처음 찾았을 때, 문득 내 대학 시절 자취방이 떠올랐다.
직장에 가까운
곳
에서 아들은 독립을 하여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삶을 축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 젊은 날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내 대학 시절 자취방은 지금의 원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열악했다.
연탄아궁이 하나와 낡은 나무 바닥, 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허술한 창문이 전부였다.
밥 한 끼를 해결하려면 연탄불에 밥을 짓고 국을 끓여야 했다. 연탄불이 쉽게 붙지 않으면 번개탄을 쓰곤 했는데, 한 번은 연탄불을 피우다 이산화탄소가
가득 차서
혼비백산
했던 기억도 있다. 아직도 그때의 혼란스러운 순간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머리를 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도가 없으니 우물가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았고, 겨울에는 그 차가운 물이 손가락을 저리게 했다. 서걱서걱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그 시절이 지금은 참 멀고도 가깝다.
우물가에서
찬 물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빠지지 않아 흰옷은 누렇게 바래만 갔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수건과 양말은 수시로 도둑맞았다. 나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이 가져갔겠지... 쓴웃음이 나왔다.
연탄가스가 방을 가득 채웠던 날도 잊을 수 없다. 깊은 잠에 빠져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지경에서 가까스로 깨어나 문을 열고 살아남았던 그 순간, 내 생명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연탄불을 더 조심스레 다뤘다.
끼니마다 먹는 것이 걱정이었고 귀찮았다.
맨밥에 계란 하나를 간장에 비벼먹거나
라면으로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디선가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찾아 나섰다. 한 끼를 해결할 묘수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부랴부랴 학교 의료실에서 진단받으니 영양실조에 이질이라고 했다. 172cm에 53kg이었다.
1년 내
술독에 빠져 살았다.
허구한
날 막걸리에 소주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코끝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기겁할 노릇이었다. 방학 동안 고향 집에서 밥 먹은 날도 손꼽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친구가 좋았는지... 동가식서가숙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살면서도 나는 웃으며 살았다. 꿈을 품고 살았고, 친구와 선후배들과의 우정, 미팅의 설렘,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들이 내 삶을
지탱해 주었다.
직장을 잡고서야 보일러 방으로 옮겼다. 1평짜리 좁디좁은 곳에 달랑 비키니옷장 하나였다. 자다 보면 벽에 박치기하다 깨기 일쑤였다. 끼니는 아예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갔다. 그래도 실내에서 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셔츠와
겉
옷은
세탁소에 맡겼다.
홀로서기
의 고달픔은 결혼으로 해결해야 할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출장 갔다 돌아오면 차가운 방에 치르륵치르륵 형광등 들어오는 소리가 피곤함과 외로움을 가중시켰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운 좋게 아내를 만났다.
기적적으로 자취생활에서 해방되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시작한 독립생활에서 어느덧 10년이 지나 있었다.
이제는 아들의
원룸
에서 내 과거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독립의 무게는 시대를
초월해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 그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리라는
믿음은
있다.
아들의 방을 나서며
생각해 본
다. 내 자취생활의 고단함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처럼, 아들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더 강하고 단단해질
것이리라
.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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