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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Nov 28. 2024

오사카 미아

간사이 지방 여행기

1. 흰 셔츠와 감색 양복의 시간


   여유롭고 부드러운 공기가 스며드는 어느 가을날, 나는 과거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났다. 첫날은 일본 고베(神戶)에서 30년 전에 만난 예전 회사 시절의 상사들과 저녁을 같이 했다. 한때 현해탄을 넘나들며 실적 발표자료 위에서 치열하게 겨루던 우호지점의 지점장과 부장이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날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30대의 나는 일본 직원들을 만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발표는 한일 국가대표끼리 겨루고, 회식 자리에서는 술잔을 돌리며 기싸움을 벌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차 소주에 2차 양주폭탄주를 돌리며 일본인들의 혼을 빼놓았다. 고베로 가면 그들이 1차로 밋밋한 정종을 내놓았다. 그러다 2차에서 위스키 원샷 마시기 배틀로 복수를 하였다.


   우리는 서로 실적 자료를 펼치며 “이번엔 한국이 이겼어”라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때로는 치열했지만 그 경쟁은 선의였고, 동료애로 이어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를 자극했고, 그 속에서 성장했다.


   지점장은 어느새 73세가 되어 계열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고베지점을 전국 1위 지점으로 성장시킨 공로로 승승장구하며 전무까지 올랐었다. 큰 키에 서구적인 미남자였는데 어느덧 초로의 신사로 변모해 있었다.


   동석한 부장은 69세인데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순환기 분야 전문가여서 한국 의사들과 대등히 대화했고 회식 자리에서는 경의까지 표해주는 교수도 있었다.


   흰 셔츠와 감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들의 모습은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빛나 보였다. 듬성듬성한 은빛 머리칼과 나이는 그들에게 숫자일 뿐인 듯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아직도 두툼한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이런 걸 들고 다니느냐"는 나의 농담에 그들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놓을 수가 없더라고. 이게 나를 움직이게 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머나먼 30대의 날들이 떠올랐고, 당시의 그 열정과 의욕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젊은 날의 실적 경쟁에서부터 회식 자리의 웃음소리까지, 그 시절의 무용담은 그날의 저녁을 가득 채웠다. 지점장은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참 열심히 살았지. 그 덕에 지금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야. 특히 한국인은 감성이 뛰어나서 우리가 가르쳐준 내용을 즉시 받아들였고 청출어람을 보여줬지. 그러니 한국이 급성장했지!”

   그날의 만남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지금의 나는 젊은 날의 열정과 의욕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지금도 흰 셔츠와 감색 양복을 입고 무대 위를 당당히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나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고베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나간 시간은 뒤돌아보면 모두 소중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또다시 선의의 경쟁 속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을지 모른다. 흰 셔츠와 감색 양복의 시간이 내 안에서 조용히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2. 히메지의 품격, 오사카의 활기, 나라의 고요


   일본 여행의 하루하루는 각기 다른 풍경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히메지성(路城), 오사카 우메다(梅田), 그리고 나라(奈良)를 걸으며 만난 순간들은 내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2-1 히메지성: 시간의 품격을 걷다!


   히메지성에 들어선 순간, 나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뚝 솟은 하얀 성벽은 백조를 연상케 했고, 우아한 지붕의 곡선은 흘러간 시간의 품격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일본 전통 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그 성은 마치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듯, 고요하고도 당당했다.

   성 내부를 둘러보며, 그곳에 있었을 수많은 발자취와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긴 나무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평온했다. 전쟁의 격동기 속에서도 이 성이 버텨낸 세월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성 밖으로 나오는 길,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성벽에 부딪혀 다시 흘러갔다. 그 바람은 마치 나에게 "너의 시간도 이처럼 단단하길"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2-2 오사카 우메다(梅田): 빛나는 거리의 에너지


   다음 날 향한 곳은 오사카의 우메다였다. 쇼핑과 활기의 중심지, 우메다는 히메지성과는 정반대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가게들은 도시의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백화점 거리를 걸으며, 옷 하나를 고르기 위해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은 구석진 가게에서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골랐다. 무언가를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이 활기찬 거리에서 하나의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길거리 음식을 맛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코야키를 입에 물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음이 번졌다. 이런 번잡한 혼잡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2-3 나라(奈良): 고즈넉한 사원의 고요함

   그리고 마침내 나라로 향했다. 히메지와 우메다를 지나 도착한 나라(奈良)는, 모든 것이 조용히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의 거대한 대불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웅장함에 말을 잃었다. 34년 전 신혼여행으로 왔던 곳이었다. 높고 넓은 목조 건물 안에서 들리는 경건한 침묵은 나를 압도했다. 거대한 나무 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걷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난 듯했다. 

   사람과 친숙한 사슴들은 여행객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그 선한 눈망울로 먹을 것을 원했다.

   과자를 주는 사람에게 커다란 뿔을 들이미는 수사슴은 신령이 깃들어 보일만한 신록(神鹿)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대불전을 나온 뒤 세계문화유산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로 향했다.

   삼천 개의 등롱(燈籠)이 늘어서 있는 경내는 신비로웠다. 등롱 하나하나가 마치 시간을 밝히는 등불 같았다.

   이곳은 자연과 신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작은 돌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사슴 무리가 천천히 지나갔다.

   나라(奈良)에서는 사슴마저도 서두르지 않았다. 여유로움과 아늑한 고대의 도시에 신령이 깃든 영물들... 부처의 온화한 미소까지... 아직도 서두는 삶에 얽매인 내가 부끄러워졌다.


2-4 시간의 조각을 모으며


   히메지의 품격, 오사카의 활기, 나라의 고요는 각각 다른 색채를 선물했다. 그 색채들은 마치 여행의 파편처럼 마음속에 잔존되었다. 히메지에서는 단단한 시간의 힘을, 우메다에서는 순간의 생동감을, 나라에서는 고요 속의 경외를 배웠다.


   돌아가는 길, 문득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일상도 조금은 풍성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결국 발 디딘 모든 공간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니까.


3. 한국의 폭설, 결항, 귀국의 희망


   고베의 맑은 공기와 딸의 환한 웃음을 뒤로하고 귀국길에 오르던 날이었다. 한국에 117년 만에 내린 폭설 소식은 내 계획을 한순간에 뒤흔들었다.

   항공사의 지연 연락에 연이은 결항 통보가 날아들자, 멍하니 휴대전화만 바라보았다. 검색창에는 "귀국 편 예약"이란 단어가 반복 입력되었고, 나오는 답변은 단 하나였다. "전석 매진." 내일도, 모레도 모든 좌석이 꽉 찼다. 그나마 빠른 재확인도 이틀 뒤에라니, 희망은 저 멀리 건너편에 있었다.

   일단 간사이공항(西空港)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무지개를 보았다. 기적 같은 좌석 하나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품었다.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 창구를 찾아다녔고 일본 항공사들도 가보았다. 돌아온 답은 차가운 "불가능"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지쳐가던 중, 아내가 보내온 한 통의 메시지가 작은 불씨를 피웠다. 일본 정보사이트에서 저가 항공사가 결항 편 대체 항공기를 띄운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항공사로 뛰어갔다. 창구 앞에서 긴장된 얼굴로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 섰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직원이 말했다. “1시간 뒤 다시 와주세요.” 애타는 마음으로 공항 한쪽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시 창구로 돌아갔을 때, 드디어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비록 왕복 항공권 가격에 맞먹는 거액이었지만, "오늘"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덮었다. 그래! 오늘 돌아갈 수 있다니! 이런 비상시국에 그까짓 돈은 문제가 안 되었다.

   비행기는 밤 10시 반에나 출발한단다. 한국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 테니 집으로 가는 교통편은 이미 끊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내일 아침을 집에서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불편함을 잊게 한다. 공항 한구석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공항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묘한 안도감과 피곤함을 느낀다.

   오늘 돌아가지 못한다면 오사카 시내로 가서 숙소를 잡고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딸 집으로 다시 가기에는 멀고, 그렇다고 항공편을 마냥 기다리기엔 너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 밤, 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결항이라는 벽 앞에서 느낀 좌절, 그리고 자리를 확보했을 때의 희열, 이 모든 경험은 여행의 또 다른 기억이 되었다. 세상은 결코 계획대로만 움직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길은 열리는 법이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다행이다”라는 말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4. 여행지에서 만난 나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낯선 거리,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돌발 사건들은 나를 긴장시키고 때로는 놀라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낯선 환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익숙한 무언가를 더 깊이 느끼곤 한다. 그것은 바로 가족의 소중함, 내 나라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4-1 가족의 소중함, 그리움의 온도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가족의 부재다. 낯선 풍경 속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할 때, 떠오르는 것은 늘 가족의 얼굴이다.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보았을 때, 그 맛있는 간식을 애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혼자 식당에 앉아 있을 때면, 가족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식사했던 장면이 머릿속을 맴돈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당연한 듯 느껴졌던 순간들이 여행지에서는 그리움으로 변한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잊고 있었던 소중함을 이렇게 낯선 곳에서 다시 발견하고 있다는 것을.


4-2 애국심, 고국을 떠올리며


   여행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고국을 비교하게 된다. 예컨대 일본의 질서 정연한 거리와 정갈한 문화는 감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특유의 정감 넘치는 소란스러움과 따뜻함이 떠올랐다. 어느 작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들어본다. 고향의 옛 골목에서 들리던 발소리와 시장의 활기찬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공항에서 출국장을 지나면서 봤던 태극기가 떠올랐다. 우리 국적기가 여행지에서도 내게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내 뿌리와 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한국인임을 느낀다. 고국은 단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곳이라는 사실을 여행 중에 깨닫는다.


4-3 나의 정체성, 낯선 곳에서 나를 보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던가? 여행은 나를 거울처럼 비추는 순간들을 선사한다. 처음 방문한 도시의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길을 헤맬 때, 익숙지 않은 언어로 간신히 물건을 살 때,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이 쌓일수록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익숙함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은, 평소 내가 알던 모습보다 더 허둥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단단하며 유연하다.


4-4 임기응변,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다


   여행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항공기가 지연되거나 결항되기도 한다. 예약한 숙소가 취소되거나, 예상치 못한 길을 걷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 나는 임기응변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한 번은 숙소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날의 나는 평소 같으면 불안해하며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지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며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나 자신에게 작은 승리를 선물한 기분이 든다.


   여행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길을 찾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나아진 내가 된다.


4-5 여행은 나를 깨닫는 과정


   가족의 소중함, 고국에 대한 애정, 나의 정체성,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여행은 그 모든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낯선 곳을 떠돌며 결국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창문 너머 구름 사이로 고국의 땅이 보일 때, 우리는 안도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여행은 내 삶의 또 다른 배움의 장이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더 풍성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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