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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Nov 11. 2024

정읍 여행길

내장산 단풍은 아직 절정이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정읍으로 떠난 여행은 주말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막상 도착해 보니 내장산의 단풍은 아직 10%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산 입구에서 하늘을 비추는 내장호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파란 호수와 서늘한 바람, 왜가리와 철새떼...

비록 화려한 색을 입진 않았어도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정읍에선 구경(九景: 아홉 가지 경치)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1경은 내장산 단풍터널, 2경은 옥정호 구절초 정원, 3경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4경은 무성서원 상춘공원, 5경은 백제가요 정읍사공원, 6경은 피향정 연꽃, 7경은 정읍천 벚꽃 길, 8경은 쌍화차 거리, 9경은 백정기 의사 기념관.

뭐든 하나라도 제대로 보고 가자고 결심했다.


   함께 간 친구가 입구 근처에 있는 내장산조각공원부터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조각공원 옆에는 전봉준 공원과 갑오동학혁명백주년기념탑이 서있었다. 조병갑 군수와 담판을 짓던 전봉준 장군과 부하들을 새긴 부조가 발을 머물게 하였다. 그날의 함성이 귓전에 울려 퍼졌다.


   조각공원은 그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조각 작품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다. 호수와 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솔티마루길을 밟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4대 미술전 수상작들인 현대 조각작품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추상작도 있었지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새 곤줄박이와 호랑나비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자연 속 생명들은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고 예쁘디예쁜 모델이 되어주었다.

   

   군데군데 물든 단풍과 낙엽밭, 대봉감이 하나둘씩 가을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정읍사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의 산책길을 걸으며 분홍빛 핑크뮬리와 함께 유난히도 인상 깊었던 대금 부는 미녀를 보았다. 드론을 올려놓고 미녀를 찍는 걸 보니 프로 연주자인 모양이다.


   소원을 담은 등이 줄지어 걸린 산책로는 마치 작은 소망들을 하나씩 비춰주는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망부상 밑에는 정읍사의  '아으 다롱디리' 후렴구가 보인다.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노래이며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

지고지순한 태도로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여인이여...

21세기에도 이런 여인이 있을까?

아직도 정읍에는 있을 듯하구나!


   정읍사공원에서 내려다보면 고즈넉한 정읍시가 보인다. 어디선가 정겹고 영롱한 우물물이 콸콸 쏟아질 듯 아름답고 멋진 문화의 도시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유명한 전통찻집을 찾아 쌍화차 두 박스를 샀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잔의 온기는 어지러운 마음을 더 편안하게 가라앉히리라.


   대구볼태기국으로 뱃속을 든든히 채우니, 온몸이 따뜻해지며 다시 길을 나설 힘이 솟아났다.


   다음 행선지는 칠보발전소 근처에 있는 옥정호였다. 호수에 비치는 산 그림자가 일렁이는 물결과 어우러져 더없이 고요하고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호숫가 근처에 자리한 '애뜨락' 전망대와 '앙 갤러리' 카페에서 그림 같은 옥정호와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짧은 시를 지어 보았다.


   '바람이 지나도 어긋남 없이 호수에 새겨진 그늘 같은 사랑'이 주제였다.


   '산 그림자는 흐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리니...'

적막함 속에서도 깊어가는 계절이 더욱 절절히 느껴졌다.


   까치밥을 남겨둔 주민의 인정도 정겨웠다.

새빨간 '남천' 열매는 망부상 여인의 단심(丹心)인가?


   어둑어둑 저녁이 내려앉을 무렵, 정읍역 앞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감자탕 한 그릇을 맛봤다.


   역 앞에서는 기타를 치는 아저씨들의 버스킹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읍 특산품을 판매하는 장이 서있었는데 버스킹은 사람을 끄는 흡인력이 있었다.

흥에 겨운 나그네들이 무릎을 굽히다 허리를 들썩이며 떼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소박한 연주가 하루의 모든 일정을 따뜻하게 마무리해 주는 느낌이었다.


   늦은 밤, 정읍역에서 기차에 올라타, 공주역에서 수서역까지는 입석으로 차표를 연장했다. 창밖에 스쳐가는 어둔 가을 풍경을 뒤로한 채, 하루의 여운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한 시간을 서있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진한 우정과 가을의 그리움을 간직한 하루...


   문득,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정읍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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