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꼬메오름

바람이 길이 되는 곳에서

by 글사랑이 조동표

노꼬메오름, 바람이 길이 되는 곳에서


제주 애월의 숲은 언제나 묵묵하다. 말없이 사람을 품고, 또 말없이 떠나보낸다. 오늘 나는 노꼬메오름으로 향했다. ‘833m’. 숫자만 보면 아주 높은 고도는 아니지만, 막상 오르기 시작하니 숨이 가빠졌다.


이정표

- 오름의 초입, 숲의 숨결


입구의 안내판은 오래된 나무판에 새겨진 듯 빛바래 있었다. 애월읍주민자치위원회가 쓴 노꼬메 안내문을 옮겨본다.


애월읍 소길리 산258번지와 유수암리 산138번지에 있는 이 오름은 표고가 833m이고 비고가 234m이며, 일찍부터 "놉고메"로 부르고 한자표기로는 高山高吉山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놉고메"는 노꼬메로 소리가 바뀌게 되고, 이것을 반영한 한자표기도 鹿高山(녹고산: 노꼬메)으로 쓰기도 하며 떨어진 2개의 오름으로 되어 있다. 좀 높고 큰 오름을 "큰노꼬메'로, 작고 낮은 오름을 "족은노꼬메" 라 부르고 있다. 큰노꼬메는 귀가 뾰족하게 도드라진데다 가파르며 정상에는 남,북 양쪽에 두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화산체이다. 북동쪽에 이웃한 족은노꼬메는 경사가 낮지만 가시덤불을 비롯한 자연림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오름정상은 가운데가 우묵하고 남북으로 두 봉우리가 마주보는 형태의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노꼬메 안내문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다.”

“탐방로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도록 남은 글씨들은, 오름이 직접 건넨 인사 같았다. 숲은 아직 짙은 단풍이 들지 않아 초록빛이 많았다. 습한 흙내음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원시림의 나무들이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었다.


자연보호수칙, 탐방객 에티켓

오르는 길에서 여러 부부를 만났다. 어떤 이는 이곳이 생각보다 가파르다며, 다른 오름들의 매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누군가는 군산오름의 아름다움을, 또 누군가는 새별오름의 풍경을 말했다. 사람들에게 오름은 ‘산’이라기보다 ‘삶의 한 장면’이었다.


유독성 식물인 천남성 열매
개서어나무, 산딸나무
까치박달, 때죽나무
삼나무, 산벚나무
음나무, 산뽕나무

- 정상에서 만난 세 자매와 여든의 할머니


비탈진 계단과 거적길을 오르며 숨이 찰 즈음, 드디어 오른쪽에 한라산 남벽이 나타났다. 하지만 흐린 날씨 탓에 뚜렷한 자태를 느낄 수 없어 안타까웠다. 대신 억새밭이 반겨주었다.


한라산, 억새밭

정상에 오르자 세 자매와 그들의 어머니를 만났다. 여든 살 할머니였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걸음으로 오르셨던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 나이에 이만큼 오르면 됐지요.”

그 웃음에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기운이 있었다. 833m의 오름보다, 그분의 마음이 더 높았다.


정상에서 바라본 전경

정상은 바람의 언덕이었다. 사방으로 억새가 은빛으로 흔들리고, 남쪽에는 다래오름, 북쪽에는 노로오름이 서로를 바라보듯 마주 서 있었다.



흐린 하늘은 구름을 얹은 채 멀리 한라산을 품고 있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대신 바람이 풍경을 대신했다. 잎이 바래기 시작한 활엽수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노꼬메' - 높고 아름다운 이름 그대로였다. 833m의 고도보다 더 높게 마음이 들썩였다.



- 내려가는 길, 다시 만난 인연


하산은 익숙한 길 대신 낯선 길로 정했다. 족은노꼬메 방향으로 급경사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순간, 산사나이 한 분이 다가왔다.

“왼쪽 능선길로 가세요. 20분은 더 걸리지만, 풍경이 훨씬 좋습니다.”

그의 말처럼 능선을 따라 걷자 숲이 다시 깊어졌다. 삼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나무 사이로 흩뿌려지는 빛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삼나무숲

한참을 내려오던 중, 멀리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노루였다. 잠시 나를 바라보다 금세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산이 내어준 선물 같았다.


하산 길에서 다시 그 할머니를 만났다.

제가 멀리 돌아 내려오다 보니 여기서 또 만났네요.”

할머니는 웃으며 지팡이도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리는 굽었지만 기력이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할머니의 미소처럼 모든 여정은 결국 '살아있음의 기쁨'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느꼈다.


- 이(夷)죽을홈에서 마주한 순간


하산길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안내판이 보인다. 이(夷)죽을홈. 왜구의 침입을 피해 제주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골짜기. 그 안에서 젊은 장정들이 목숨을 걸고 마을을 지켰다는 이야기.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오래된 숨결처럼 느껴졌다. 이 곳의 나무와 돌, 흙 한 줌마다 누군가의 용기와 슬픔이 서려 있을까.


이(夷)죽을홈

- 산이 가르쳐준 것


오름은 부드럽고, 숲의 냄새가 짙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숨소리가 하나의 리듬을 이루었다. 인생의 오름도 결국 이런게 아닐까.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따르지만,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호흡으로 가는게 인생이리라.


정상에 오르는 길과 하산 길 계단

이번 오름길은 평화로웠지만, 동시에 산의 질서를 느끼게 했다.

‘길을 잘못 들면 위험하다.’

그 단순한 사실이 경고문처럼 다가왔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미리 확인하고 천천히, 그리고 끈기 있게 나아가야 한다.


수많은 이정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 다시 숲의 품으로


노꼬메오름의 마지막 길은 잔잔한 흙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억새는 춤을 추고 있었다.


노꼬메오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천천히 오르라. 경치를 음미하라, 그리고 조용히 내려오라."

그 말의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바람이 길이 되어주고, 사람과의 만남이 기억이 되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제주 노꼬메오름이었다.


노꼬메오름이 녹고(鹿高)뫼오름으로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