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새해의 기도>

고통으로 사랑받는다는 것

by 글사랑이 조동표

고통으로 사랑받는다는 것

- 정호승의 <새해의 기도>


태백산 일출 시작

새해의 기도: 정호승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 주세요

저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지만 올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올해도 저를 쓰러뜨려 주세요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아오니

올해도 저를 거침없이 쓰러뜨려 주세요

그렇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 주소서


올해도 저를 분노에 떨지 않게 해 주세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

기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렇지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 주세요.

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 주세요.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 주세요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중에서

2022년 창비



해가 바뀔 때마다 나는 결심보다 기도를 먼저 꺼내 든다.

올해는 무엇을 더 잘해보겠다는 다짐보다,

무엇을 덜 무너지며 견뎌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정호승의 <새해의 기도>를 다시 꺼내 읽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 주세요.”


이 문장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잠시 멈추게 된다.

사랑과 고통을 같은 문장 안에 두는 용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체념과 각오.


젊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은 위로여야 하고,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고통은 종종 가장 성실한 방식으로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패하지 않고는 방향을 바꾸지 못했고,

상처받지 않고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언제나 ‘쓰러짐’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쓰러뜨려 달라는 간청이다.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이제 아오니.”


이제야 안다는 고백.

이 문장은 젊음이 아닌 중년의 문장이다. 버티는 힘보다 다시 일어나는 법을 조금은 배운 사람의 언어다.

넘어지는 일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보다, 넘어져도 회복 가능한 선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마음.


시인은 늘 단서를 남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말아 달라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는 쓰러뜨리지 말아 달라고.

그 단서들이 이 시를 절망이 아닌 현실의 기도로 만든다.



분노에 대한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분노보다 기도를 선택하게 해 달라는 바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분노 앞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시는 결국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한다.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문장에서 나는 오래 머물게 된다.

사람은 남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기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더 오래 흔들린다.


그때 하지 못한 선택,

그때 지키지 못한 약속,

그때의 비겁함과 조급함.


새해가 된다고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부족했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노라고.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시는 새해를 잘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대신, 무너지더라도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새해의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도 우리는 쓰러질 것이다.

다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만큼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태백산 일출: 2026. 1. 1 사진작가 허종욱 작품
이 어린이의 기도는 이루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