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림을 본다는 착각에 대하여
발 디딜 틈 없는 미술관에서
- 우리가 그림을 본다는 착각에 대하여
설 연휴였다.
고속도로는 막히고, 식당은 가족들로 넘쳤고, 카페는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사람을 피하려 미술관으로 갔다.
세종문화회관.
그런데 그곳이 가장 붐비고 있었다.
입구부터 줄이 길었다.
표를 끊고 들어가니 사람의 흐름 자체가 전시 동선이었다.
나는 그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전시 제목은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600년 서양미술사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설 전날, 이 많은 사람들은 왜 그림을 보러 왔을까.
- 우리는 무엇을 보러 오는가
르네상스의 방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카메라 표시가 있으면 얼른 찍고 지나갔고, 대부분은 촬영 금지였다.
그런데도 어떤 그림 앞에서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리아의 얼굴
성인의 손
빛이 떨어지는 방향
설명을 읽어서 이해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저 오래 바라보게 되는 종류였다.
그때 르네상스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을 발견한 시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인간을 신처럼 그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설명하던 그림에서 설득하는 그림으로
바로크로 넘어가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렬한 명암
과장된 몸짓
감정의 폭발
이제 그림은 설명하지 않는다.
설득한다.
누군가는 가까이 다가가고
누군가는 멀찍이 떨어져 본다.
같은 그림인데 보는 거리가 다르다.
아마 살아온 시간이 다른 탓일 것이다.
이 시기부터 그림은 교리가 아니라 경험이 된다.
사람은 이해할 때보다 느낄 때 더 믿기 때문이다.
수르바란의 양 앞에서는 털이 보이고 무게가 느껴지고 묶인 끈이 아프게 다가온다.
- 만질 수 있는 세계
로코코와 신고전주의를 지나 사실주의에 이르면 그림 속 대상은 성인도 왕도 아니다.
그냥 사람이다.
상징이 존재가 되는 순간.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에서 세계와 접촉하는 존재로 바뀐다.
- 순간으로 남는 세계
그리고 인상주의.
사람들은 여기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빛이 흔들리고
윤곽이 흐려지고
그림은 이야기가 아니라 순간이 된다.
그제야 우리는 의미보다 순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은 구조가 아니라 경험이 되었고, 그림은 사건이 아니라 체류 시간이 되었다.
- 20세기의 모더니즘
역사학자들이 후기 인상주의로 부르는 부류이다.
주로, 점묘주의, 야수파, 상징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흐름을 포괄한다.
- 미술관에서 본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출구 벽에 고야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성에게 버림받은 환상은 불가능한 괴물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성과 환상이 결합하면 예술의 어머니이자 경이의 근원이 된다.”
이상하게도 전시장 전체에서 그 문장 앞이 가장 조용했다.
생각해 보면 명절도 그렇다.
전통이라는 이성과 각자의 삶이라는 환상이 섞여 가족이라는 이상한 예술이 만들어진다.
밖으로 나오니 광화문에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여전히 입장 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오늘 그림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신 사람을 많이 보았다.
- 인간 인식의 역사
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그림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역사를 본다.
신을 이해하려던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고,
현실을 만지는 인간이 되었으며,
마침내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더 정확하게 세계를 그리게 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적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 명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날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정 작품이 아니었다.
같은 것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명작은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러 모여드는 인간 쪽에도 있다.
설 연휴의 미술관은 어쩌면 작품보다 인간이 더 장관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보는가, 아니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확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