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으로 말하는 배우들

설 연휴에 만난 세 개의 시간

by 글사랑이 조동표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들

- 설 연휴에 만난 세 개의 시간


설 연휴였다.

일찍 고향에 다녀온 나는, 밤이면 동계올림픽을 틀어 두었다.

스노보드의 도약, 피겨의 회전, 쇼트트랙의 질주, 그리고 컬링의 유쾌한 전략.


10대를 필두로 MZ세대 선수들의 젊은 에너지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컬링에서는 해외 50대 선수들노련함도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젊음의 폭발과 경륜의 절제.

그 대비를 보며 낮에는 극장으로 향했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권력의 얼굴을 다룬 두 편의 영화.

그러나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줄거리보다 배우들의 눈빛이었다.


1. 정보원의 눈빛, 나이의 무게

- <휴민트>


먼저 본 작품은 휴민트.

남북 정보전을 다룬 첩보극이다.


스크린 속 조인성은 더 이상 청춘의 아이콘이 아니었다.

대신 말보다 눈빛이 많은 배우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서늘했다.

흔들림이 없고, 설명하지 않는다.

총을 들고 있을 때보다 침묵하고 있을 때 더 긴장감이 돌았다.



그 옆의 박정민은 달랐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다.


조인성이 얼음이라면, 박정민은 체온이었다.

완벽한 요원이 아니라, 작전과 양심 사이에서 갈라지는 인간.


특히 침묵의 장면에서 그의 눈동자는 먼저 무너진다.

그 균열이 오히려 진짜 같았다.



영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조인성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그 말에는 아쉬움보다 안도가 있었다.

청춘의 배우가 중년의 배우가 되는 과정.

그 시간의 축적이 눈빛에 고여 있었다.


나 역시 나이를 먹고 있으니,

그의 변화가 낯설지 않았다.



2. 청령포의 겨울

- <왕과 사는 남자>


그리고 다음 날 본 영화,

왕과 사는 남자.


1457년.

왕위에서 쫓겨난 16살의 어린 선왕(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이 영화는 거대한 전투로 긴장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거리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선왕을 연기한 배우는 박지훈.

스물여섯의 배우가 열여섯의 단종을 연기했다.



선왕은 왕관도, 궁궐도, 권력도 잃었다.

남은 것은 이름과 기억뿐.


그의 연기는 과장되지 않는다.

분노를 터뜨리기보다 처연한 눈빛으로 버틴다.


억울함, 자존심, 체념,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위엄.

그는 ‘왕이었던 소년’을 연기한다.



특히 강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의 눈은 놀랍도록 차갑고도 슬프다.

젊지만, 이미 오래 살아본 사람 같은 눈.


연기는 기술이지만, 울림은 재능이다.

그는 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곁에 선 인물이 있다.

청령포의 촌장, 엄흥도.


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유해진.


엄흥도는 대신도, 권력자도 아니다.

산골 마을의 촌장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단단한 인물이다.


강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목숨 걸고 수습해 장례를 모시는 인물.

그의 충성은 제도에 대한 충성이 아니다.

눈앞의 어린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유해진은 이 인물을 과장하지 않는다.

넉살스러운 웃음 뒤에

깊은 결기를 숨겨 둔다.


권력 앞에서는 몸을 낮추지만

인간 앞에서는 당당하다.



또한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 역시 강렬했다.

그의 눈빛과 풍채는 카리스마 권력 그 자체였다.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



3. 세 개의 시간


설 연휴 동안 나는

젊은 올림픽 선수들의 눈빛을 보았고,

중년 배우의 절제된 눈빛을 보았으며,

스물여섯 청년의 비장한 눈빛을 보았다.


조인성의 눈에는 세월이 담겨 있었고,

유해진의 표정에는 삶이 묻어 있었으며,

박지훈의 눈빛에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야기의 속도에 끌렸다.

이제는 인물의 눈빛에 오래 머문다.


권력의 냉혹함도,

충성의 인간미도,

유배지의 고독도,

결국은 사람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설 연휴,

나는 영화 두 편을 본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시간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