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아버지의 해방을 축복하며...
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나는 쉰 살이 다 되도록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회사와 집 밖에 모르는
한심하고 철없는 쉰 살의 미혼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존재가 너무 무서웠고. 철이 들고 이십 대는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냈고
삼십후반에는 결혼하라는 잔소리가 싫어 독립을
했고 사십 대가 되어 부모의 맘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쉰 살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부모님은 항상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칠순 후반의 아버지는 뇌경색 판정으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6년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작별인사도 없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엄마의 전화 그때까지도 나는 또 괜찮아지시겠지,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에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고 구급대원은 아버지가 다니시던 병원 응급실로 갈 테니 그쪽으로 직접 오라 했다. 동생이 먼저 도착했는지 동생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누나 아버지 연명치료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라는데" 이소리에 이제는
정말 아버지와의 작별을 준비해야 되는구나 생각했다. 운전 중에 눈물이 흘려내려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눈물이 흘러 앞이 안보였다.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간이의자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엄마와 여동생.
남동생의 응급실 출입증을 건네받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코줄을 끼고 의식 없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힘들고 고달폈던 이 세상과의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편안해 보이며 가쁜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밤새 안녕이라고 지난 주말에 잘 가라는 인사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장례식, 처음 큰일을 당해서 뭘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병원에서 시키는 데로 장례식장부터
결정하고 장례식장에 연락을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이 차려지고 가장 아버지다운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선택했다. 입가에 미소지으며 남양성모성지를 방문했을때 찍은 사진이다.
장례식 내내 위로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나에게 형식적인 말로 들렸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나는 한쪽팔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보호자 엄마, 내가 보호를 해야 되는 건지 엄마가 나를 보호해야 되는 건지. 각자의 가정이 있는 동생들은 이미 가족들과 떠나고 홀로 남은 엄마와 나는 쓸쓸함과 아련함으로 텅빈 집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방과 침대에서는 아직도 아버지의 채취가 남아 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올것만 같은 나의 아버지
어디 아픈곳 없냐는 엄마의 질문에 항상 마음이 아프다고 답하는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커피솦 투어를 자주 했다. 커피와 달콤한 빵한조각에 행복해 하시던 나의 아버지가 그리운 하루이다
상속정리를 위해 면사무소를 들렸다. 아버지 사망신고와 남겨주신 유산을 정리하며 아버지의 팔십 평생의 흔적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 가는 그런 기분이였다. 아버지의 팔십 평생의 흔적이 며칠사이에 사라지고 고인으로 남은 나의 아버지 항상 감사하고 그립습니다. 부활절 사순시기에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던 아버지의 바램처럼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그날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다.
고생하신 나의 아버지 하느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