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와 흰색 티를 같이 빨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들었고, 난 하늘색 티셔츠를 얻었다.

by 최아름

며칠 전 엄마와 괌을 다녀왔다. 2022년에 한국을 나가는 일이 가능하구나? 갑자기 또 새삼 놀랍네.

어쨌든, 3박 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빨래를 했다. 세탁기에 세제를 넣고 돌리고 말리는 것이 뭐 그리 귀찮다고 집 앞에 있는 세탁소를 가, 캐리어를 열고 세탁을 위한 돈을 넣었다. 원래 청바지는 잘 빨지 않는데 오늘따라 청바지도, 청치마도, 청 반바지까지 (그러고 보니 여행에 데님만 가져간 거야?) 빨고 싶어서 세탁기에 모든 세탁물을 넣었다. 흰 티 여러 장과, 청 어쩌구들.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하고 있던 생각도 싹 사라지고, 내 두뇌도, 그리고 마음도 세탁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다. 물론 청바지와 흰 티를 같이 넣어서 문제가 될 거란 생각도 같이 날아가 버린 게 잘못이지만.


난 라디오의 잡음, 차에서 듣는 바람 소리, 블랙베리의 타자 소리 등 작고 작은 백색 소음 같은 소리를 사랑하는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사랑하는 소리 중 하나가 됐다. 윙윙, 찰박찰박,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면서, 내 안에 담긴, 꽤 많은 것들이 세탁되길 바라는 마음에 더 사랑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옷은 세탁해주는데, 마음을 세탁해 주는 기계는 왜 없을까. 누군가 내 마음에 ‘세탁’ 버튼을 누르면 우울했던 마음이 세탁되고, ‘건조’ 버튼을 누르면 젖어있는 생각이 뽀송하게 마르는. 말도 안 되지만 그런 기계 말이다. 인간도 로봇처럼 꽤 단순하게 살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면 좋았을걸. 세탁에 곁들여 ‘삭제’와 ‘다시 시작’ 버튼도 함께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고. 뭐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쯤, 세탁이 완료됐다.


뻔한 얘기지만, 내 청 어쩌구 친구들은 나의 하얀 티셔츠 위에 흔적을 남겼다. 엄청 티가 나는 건 아니었는데, 딱 봐도 이건 ‘흰색 티셔츠’가 아닌 하늘색? 혹은 뭐 그 비슷한 즈음의 색이 된 티셔츠였다. 못 입고 다닐 정돈 아닌데, 그냥 자취 초보의 실수처럼 보일까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살림조차 못 하는 자취생처럼 보이긴 싫은데.


요 며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괌에 갈 땐 좋아하는 옷만 넣었다. 행복한 기억을 같이 캐리어에 담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선 행복한 기억만 남기기 위해. 몇 년 전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티셔츠를, 굳이, 일부러 괌에 들고 갔다. 티셔츠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마는, 난 꼭 이런 작은 것에도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인지라. 그런 티셔츠에, 하필 물을 들게 한 것이다.


분명 같은 옷인데, 묘하게 달라 보였다. 조명 색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집에 들어와 다시 한번 티셔츠를 펼쳐봤다. 흰색 조명이 쨍하게 비치는 우리 집에서 보니, 더욱이 푸른색이 확연해진 게 아닌가? 티셔츠를 가만히 보다가, 그 자리에서 크게 울어버렸다. 웃겼다. 어젯밤엔 울고 싶어서 온갖 슬픈 드라마 장면을 다 들여다보고, 나윤권과 성시경의 노래를 잔뜩 들었는데도 못 울었는데, 티셔츠 색상 하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눈물이 나다니.


티셔츠는 그대로 내 서랍 안에 넣어뒀다. 그렇지만 뭔가 변질이 됐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차렸다.

나도, 그대로 있는데, 뭔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다시 실감했다. 얼굴도 그대로고, 몸무게도 그대로고, 하는 일도 그대로고, 쓰는 문체마저 그대론데, 뭔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다시 만나보자 손을 내밀어 보았던 그 순간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어났다!’라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고, 예쁜 하늘을 보았을 때 보낼 곳도 사라졌으며, 자기 전에 ‘잘자!’라는 그 흔한 인사도 보내지 않게 됐다. 어디든 혼자 있어도 든든하게 채워지던 마음 한구석에 자리가 생겼고, 슬픈 노래를 남의 노래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네.


이것도 티셔츠처럼, 뻔한 얘기가 되어버리지만. 긴 시간을 함께해온 사랑하는 사람을 또 놓쳤다. 다른 것들은 몇 번 해보면 다 익숙해지는데, 빨래도 그렇고 이별도 그렇고, 왜 이렇게 할 때마다 실수를 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오늘은, 네가 건네준 그 흰색 티셔츠가 다른 색이 된 걸 두 눈으로 보게 된 이상한 날이다. 한참을 괜찮다 행복하다 주문만 걸고, 그렇지 않았던 걸 새삼스럽게 인정한 날이기도 하고.

시간이 약이라는 그 뻔한 말을 되뇌고 살면서, 5월을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다. 삼키고 뱉고, 또 한 번 숨 쉬면서, 그렇게 괜찮아질 날을 기대하고 고대한다. 서랍에서 꺼낼 그 이상한 색의 티셔츠를 보아도 툭 걸쳐 입고 나갈 수 있는, 퍽 씩씩한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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