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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진 Feb 20. 2022

흥선대원군의 고급 취향, 부암동 석파정

천세송, 너럭바위, 정자, 신라삼층석탑 없는 게 뭐야?

한동안 강북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던 중 '아.. 예전엔 강남 자주 다녔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압구정 미술관에 가기로 했는데 가기 전 검색해보니 아뿔싸 휴무날이었다. 집에서 출발 직전 놀러 갈 곳을 다시 찾아야 했고 적당히 실내를 즐길 수 있으면서도 사람은 없고 구경거리는 많은 곳을 찾다가 '석파정'을 선택했다.


석파정에 가려면 서울미술관 전시를 포함해 15000원을 내고 입장해야 한다. 사실 전시는 평상시 내가 찾아가서 감상하는 종류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연 작가의 <검은 장마>는 유일하게 작품명까지 기억에 남는다. <검은 장마> 속 '삶이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단순히 뭉쳐 놓은 것이다. 좋은 것들을 읽고 싶다. 그런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다. 그렇게 친구와 전시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작품을 구경하고 석파정에 가기 위해 4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석파정에 올라와서 야외 안내도를 봤음에도 뭐부터 구경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친구가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고 말했다. 커다란 나무도 있고 해서 별서 쪽을 먼저 볼까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신라삼층석탑 쪽으로 먼저 향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만난 신라삼층석탑. 왜 이 석탑이 이곳에 있을까 친구랑 의아해했다. 리플릿에도 설명이 간단히 나와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통일 신라시대 석탑의 모습으로 경주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되었고 2012년에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곳에 있었을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전 설치되었다는 점에 수긍이 됐다.


신라삼층석탑을 간단하게 보고 올라오니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석파정을 구경하는데 친구가 이곳의 나무들이 다 엄청 두껍다고 했다. 사실이다. 밑에서 언급할 천세송 말고도 석파정 곳곳의 나무들이 우람하고 듬직하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들이 지닌 세월을 눈으로 체감하게 한다.


나무 앞에서 바라본 별서의 사진을 두 장 담아보았다. 평소에 사진을 찍을 때 가로로도 찍고 세로로도 찍고 비율도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찍는다. 그렇게 해서 가장 어울리는 사진을 첨부하는데 이 별서의 사진은 두 장 다 포기할 수 없어서 모두 넣었다.


별서 뿐만 아니라 멋진 나무, 그리고 우리가 하늘색 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색감과 구름의 조화가 날 정말 기쁘게 했다. 사진만 보면 여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뽀얀 구름에 마음이 설렜다.


그리고 옆을 보면 부암동과 그 너머의 북악산이 한눈에 보인다. 종로구 하면 서촌, 북촌도 떠오를 테지만 나는 평창동, 그리고 부암동의 빌라들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사람들이 많이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듯한 동네이다. 이곳에서 보는 부암동 빌라촌은 산을 가리고 있지 않아 좋았고, 맑은 날씨 덕에 북악산 바위까지 볼 수 있었기에 날을 잘 골라왔다는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가장 왼쪽은 내가 부암동 쪽을 찍고 있는 모습, 그리고 옆에 두 장은 앞서 가는 친구를 찍어준 사진이다. 혼자 산책하는 것도 좋은데 친구와 함께 산책하면 자연을 가득 담는 내 모습도 사진으로 남는 점, 그리고 누군가를 멋진 풍경에 함께 담아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평소 혼자 산책할 때보다 사진을 두 배는 더 많이 찍게 되는 것 같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아주 단단하게 얼어 빙판이 되어버린 냇물을 밟아보았다. 올림픽이라도 나간 마냥 미끄러지는 느낌에 잠시 피겨 스케이팅 선수에 빙의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징검다리를 건너 올라와서 다시 마주한 별서.


나무를 사랑하는 나답게 '천세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나무에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순리였다. 최근에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보호수는 봤는데 이렇게나 큰 소나무는 오랜만이었다. 노송이라고 불리는 이 늙은 소나무는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천세송'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1,000년을 살아온 소나무일까? 하는 생각이 바로 들 것 같다. 나 또한 그랬다. 500년 보호수는 봤어도 1,000년이라니! 진짜 1,000년을 살아온 나무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 1,000년일까? 땡! 리플릿에 의하면 이 나무는 약 650년의 세월을 지내온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천세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는 천년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천 년은 아니지만 650년의 세월을 자랑하며 세 그루의 나무가 자랑할 것만 같은 그늘을 혼자서 뽐내고 있다. 앞서 날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언급했는데 천세송의 매력을 한 스푼 더 느끼려면 날이 좋을 때 가야 한다. 이 멋진 그늘을 못 보고 오면 얼마나 섭섭할까?


다음은 석파정의 메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자이다. 이름은 '유수성중관풍루'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화사한 단풍을 구경하는 정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름의 뜻답게 가을에 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이라 단풍도 없고, 초록색 잎도 없었지만 물이 흐르고 날이 좋을 때 이곳에 앉아 미소 지을 흥선대원군의 모습이 상상되는 듯하다. 그리고 정자로 이어지는 돌다리가 이곳을 더욱 독보적으로 만들어준다. 혼자 누렸을 흥선대원군을 생각하며 부럽다를 연발했다.


얼어붙은 얼음을 보며 여름에 물이 흐른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다람쥐를 보며 봄이 정말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오른쪽 사진 바위 초록색 이끼 위에 다람쥐가 있다.)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간다. 생각보다 큰 석파정이라고 중간에서 포기하면 안 된다. 천세송도 보고, 정자도 봤는데 아직도 볼 게 더 남아있다.


너럭바위다. 이렇게나 큰 바위는 정말 오랜만에 봐서 신기했다. 서울 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는 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친구가 너럭바위에 관한 설명판을 읽더니 이곳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을 말해주었다. 나는 두 가지 소원을 너럭바위 앞에서 빌었다. 그러니까 너럭바위님, 꼭 이뤄지게 해 주세요!


바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오른쪽 사진을 넣었다. 바위산으로서 인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하는데 석파정에 다녀온 후에 북악산, 인왕산 등에 대해서도 검색해보며 서울의 산도 차차 알아가기로 다짐했다. 


석파정 리플릿을 가져와서 읽었는데 도심 속 비밀 정원이라는 수식어가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린이대공원도, 선릉과 정릉도 도심 속의 자연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인상 깊지 않은 단어였는데 너럭바위를 등지고 서서 바람 소리를 들으면 '도심 속 비밀 정원'이라는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알게 된다.


2021년부터 여러 자연 스폿을 찾아다녔는데 여기에서는 바람 소리뿐만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곳은 도심의 소리가 차단되었고 그래서 밖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줬는데, 이곳은 나무 소리로 인해 단절을 넘어 정원과 내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줬다. 


시각적 경험을 넘어 청각적 경험을 했다는 점이 신기했다. 이때 내가 느낀 감정까지 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나중에 꺼내 보고 싶어 짧은 영상을 몇 개 찍어뒀다.


또 위로 올라 둘러둘러 내려오며 너럭바위를 높은 시야에서도 다시 볼 수 있었다. 석파정으로 올라오기 전 서울미술관 관장이 이중섭 화백을 애정 했다고 읽었는데 길 벽면에도 황소가 있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밖으로 돌며 마지막으로 사랑채와 별채를 들렀다. 별채에 가기 전 만난 나무에 둘려 있는 짚이 뭘까 궁금했었기 때문에 검색해 보았다. 이렇게 겨울나무에 두르는 짚이나 거적, 뜨개질 나무 옷을 '잠복소'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복소'는 주요 해충들이 땅속이나 나무 틈 등의 따뜻한 곳 대신 잠복소를 월동처로 삼게 하는 것으로 봄이 되면 떼어서 제거하는 방제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2020년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병해충연구과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수목 해충의 천적인 거미류와 같은 절지동물이 더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그래서 지금은 잠복소를 지양한다고 한다. 호기심으로 인해 오늘도 새로운 지식을 하나 얻었다. 


별채에 들어서며 파워 직진하는데 뒤에서 친구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다가 새들이 집 짓나 봐!'. 새를 참 좋아하는 친구를 두니 이런 것도 볼 수 있다!

 

고종황제는 석파정에 방문했을 때 별채에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매매를 수차례 제안한 곳이다. 근데 김흥근이 이를 거절하자 계략을 세워 아들 고종을 묵게 했고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 하여 김흥근의 소유를 포기하게 하였다는 스토리가 있었다. 이걸 계략이라고 봐야 할지 절도라고 봐야 할지 모호했다. (ㅋㅋ) 그런데 정말 석파정을 걸어보면 왜 그렇게 이곳을 흥선대원군이 탐냈는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


이제 석파정을 구경하는 것도 막바지다. 석파정은 이전에 삼계동 정사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이 삼계동각자를 보고 알 수 있다고 한다. 3개의 시냇물이 만난다 하여 삼계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이렇게 창문으로 매일 같이 천세송이 보인다면 정말 술이 술술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석파정 어디서든 잘 보이는 야트막한 북악산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구경하며 나들이를 마쳤다. 너무너무 만족스러웠고, 서울 내 역사가 담긴 장소 이곳저곳을 다녀왔지만 어디와 견주어 봐도 꿀리지 않는 곳이었다. 15000원이라는 입장료가 조금 비쌌지만 꼭 다른 계절에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겨울 석파정은 완벽했다.


친구와 부암동을 걷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렸는데 눈발이 휘날렸다. 뭐 이렇게 살살 날리다가 말겠지 했는데 정말 많이 내렸다. 낮엔 맑고 오후엔 눈이 오다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날씨까지 로맨틱한 하루를 만들어주는구나 싶었다. 스무 번은 더 걸은 광화문 거리인데 유난히 이국적이고 좋았다. 매일 도피하듯 지나치는 시위 구간과 아리랑 리믹스도 친구랑 함께 걸으니까 신나고 좋았다. 어지러운 풍경도, 소리도 그날만은 즐거웠다. 이제는 그 풍경을 봐도 친구와 함께 왔던 눈 오는 날의 광화문이 생각나겠지? 눈발 아래서 찍은 셀카와 우리의 웃음이 생각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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