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미술관, 북한산을 품은 평창동 거리, 삼세영갤러리, 모리스 갤러리
평창동을 걸었다. 2018년 초에 동생과 김종영미술관을 들렀었는데 좋았었다. 그래서 조만간 또 평창동에 가야지 생각했는데 근처에 일이 생겨서 예상보다 일찍 걷게 되었다. 이 거리를 걷는데 북한산이 너무 잘 보여서 좋았다. 지금까지 이 근처를 많이 지나다니긴 했었지만 잘 몰랐는데 이 거리가 '평창동 갤러리 거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창동 갤러리 거리는 평창동 미술관 거리, 평창동 문화의 거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오늘은 평창동 거리의 모습과 함께 미술관 두 곳과 편집샵 한 곳을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김종영미술관에 갔다. 4년 전쯤에(세월...) 동생이랑 한 번 와본 적이 있기 때문에 원래 알고 있던 곳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이번에 갔을 때는 거리에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미술관 정문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걸어서 전시장 입구를 찾아 들어왔다. 알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간 날이《불각(不刻), 상(象)을 조각하기》라는 전시의 첫날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개막행사를 특별히 하지 않아 첫날이지만 조용했다.
2018년에 왔을 때도 나와 동생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도 관람객이 나 말고는 없어서 혼자 즐길 수 있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김종영 선생의 일생을 정리해놓은 것을 읽는 것도 좋았다. 특히 50세가 되던 해의 1월 1일에 일기장에 새로운 결심을 남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언간 오십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제작 생활을 실험 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 오십이란 나이는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고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셈이 될 것이다."
내가 오십이 된다면 과연 어떤 결심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또 김종영 선생이 쓰신 글 중에서 좋았던 글이 있었다. 바로 이 글이다. 조각에 대해 쓰셨지만 조각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필 원고도 전시해두셔서 함께 볼 수 있어 좋았다.
"(생략) 우리가 항상 희구하면서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정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무한한 것, 영원한 것, 행복한 것 등인데 인간은 여기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란 것을 따지고 보면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고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이 세 가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사소한 우리의 신변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한 포기의 화초나 나뭇가지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을 발견하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의 절실한 요구인 행복이란 것도 백억의 재산이나 절대한 재력에 있다기보다 극히 사소한 일시의 기분이나 생리적인 어떤 조화에서 실제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첫 번째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조각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냥 가장 왼쪽 작품이 김 낀 색 같아서 특이하고 좋았다. 중간에 있는 작품은 친구가 좋아하는 느낌이라서 찍어서 보내줬다. 그리고 이번 조각 전시를 통해 느낀 점은 조각 전시를 볼 때는 그림자도 함께 봐야 한다는 점이다. 빛과 그림자까지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평창동에서 알고 있는 곳이 김종영미술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시 관람이 끝나자마자 할 일이 없어졌다.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근처에 가보고 싶던 드라마 촬영지가 있어서 가보고 이 동네 주택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촬영지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엄청 많이 올라갔는데도 또 계단이 나오고 또 계단이 나오는 동네다. 경사가 정말 엄청 높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면 이렇게 먼 곳까지 탁 트인 뷰를 즐길 수 있다. 이날은 해가 없고 비 예보가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에 구름이 한가득 끼어있었다. 근데 구름 뷰도 not bad! 엄청 예뻤다!
그리고 내가 보러 온 곳은 바로 드라마 <런 온>의 촬영지이다. 딱히 볼거리가 있는 촬영지는 아니지만 이곳이 극 중 주인공 오미주의 집이기 때문에 꽤 비중 있게 나왔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근처 미술관 보러 온 김에 들렀다.
이젠 진짜 할 게 없었다. 어디 어디는 꼭 가봐야지! 하고 온 것이 아니라 정말 얼떨결에 와서 미술관 한 곳 가고 촬영지 한 곳 들르는 게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북한산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계속 걸으면서 북한산을 잘 나오게 찍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산은 푸릇푸릇해야 매력이 있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날 마주한 산은 아직 봄~여름이 오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멋진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돌산 사이사이에 있는 짙은 빛의 나무들이 북한산을 더 멋있게 보이게 했다. 내가 딱히 좋아하는 날씨도, 계절도 아닌데도 북한산이 너무나 멋있었다.
그리고 동네 단독주택을 보며 걸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며칠 전에 관리하기 정말 어렵다는 글을 보기도 했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와 그 뒤로 보이는 산까지 이런 뷰를 매일 같이 보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멋진 주택이 정말 많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집도, 세련되어 보이는 집도 있었다. 일부는 담이 높아서 집이 안 보이는 곳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집을 눈으로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엄청 높은 경사에 지어진 집들이 신기했다.
이제 산책을 다 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내려가는데 멋진 건물을 발견했다. 삼세영갤러리였다. 최근에 전시가 하나 끝났다고 봤는데 미술관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싶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직원 분이 나오셔서 들어오라고 하셨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오예!
기획전인 <방해받지 않는 시간>은 끝났지만 상설전시는 볼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1층 보고, 2층 본 후에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씀해주셨다. 미술관에 들어오자마자 너무 좋았던 점은 바로 이 건물이었다! 정말 특이하면서도 요즘 감성이고 통창으로 평창동이 잘 보이는 게 너무 좋았다.
1층 문을 지나쳐 오면 보이는 전시장의 모습이다. 갤러리가 너무 멋있어서 반했다. 내가 건축 지식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뭔가 더 멋진 말로 설명하고 싶은데 둥근 전시장과 큰 창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1층에는 과거의 미술품들이 있었다. 내 취향으로 가장 예쁘고 재밌는 것들만 몇 개 찍어보았다.
1층을 다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을 보면서 동생이 이 미술관에 온다면 참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 작품들은 구매가 가능했다.
2층에서 보이는 뷰도 너무 좋았다. 탁 트인 개방감이 너무 좋았다. 이 바로 옆 동에서 특별 전시가 열리는데 내가 간 날은 특별 전시가 열리지 않는 날이라 가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평창동 거리 뷰뿐만 아니라 이 바위 뷰가 너무 좋았다. 건물 바로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통창이라 그 바위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작품 뒤로 바위와 이끼가 배경이 되어주는 게 정말로 멋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는데 한 친구가 어떻게 이런 좋은 곳을 알고 다니냐고 물어봤다. 나도 그냥 걷다가 얼떨결에 발견한다고 말해줬다. 이렇게 높은 만족감을 얻게 되어 행운스러운 하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와 카페 '사랑방'에서 들어갔다. 카페 가오픈 기간이라고 말씀하시며 커피를 한 잔 무료로 주셨다. 어차피 나 혼자 밖에 없어서 직원 분께 말을 걸며 전시도 좋고 건물도 엄청 좋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건물이 예전에 출판사 건물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또 이 미술관이 과거 - 현재 - 미래를 어우르는 의미를 담았고, 곧 다음 주부터 또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니 또 오라고 말씀해주셨다. 동생이 진짜 좋아할 것 같아서 다음 전시를 보러 같이 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창동 뷰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뷰를 감상했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앞의 뷰도, 옆의 뷰도 너무 좋았다. 이곳에 앉아 아이디어 내고, 까다로운 생각하는 건 싫어서 요즘 새롭게 해 보는 중인 에세이를 썼다. 왠지 이런 뷰를 보며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내 생각을 글로 쓰니까 더 잘 써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세영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밖에서 보니 편집샵 같은 곳을 발견했다. 이름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나중에 보니 모리스 갤러리라는 곳이었다. 솔직히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확신이 안 서서 밖에서 기웃기웃거리고 있으니까 문 열어주시면서 들어오라고 해주셨다. 이날 평창동의 산책은 이방인처럼 기웃기웃거린 나에게도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덕에 더욱 따뜻했던 산책이었다.
찾아보니 모리스 갤러리는 여러 샵들이 같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도자, 책, 식물 등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 모여있었다. 나는 여기서 작은 술잔을 세 개 샀다.
위에는 출판사고 계단 바로 옆에는 엽서와 노트도 있었다. 나는 엽서도 하나 사서 집에 왔다. 아주 오랜만에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걸을 때는 그곳이 '평창동 갤러리 거리'인 줄도 몰랐는데 북한산부터 예술까지 이 모든 게 다 내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던 하루였다. 사람도 없고 평화롭고 내가 딱 좋아하는, 완벽한 내 취향의 산책이다. 집에 와서 평창동 갤러리 거리에 대해 더 찾아보니 이번에 내가 소개한 곳 말고도 카페와 갤러리가 더 많았고, 하루 만에 돌아보기엔 부족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는 엽서와 술잔을 든 채 조만간 꼭 또 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음까지 풍족해진 산책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