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월드컵이 한창일 때 릴은 가장 추웠다. 친구들과 입에 달고 살던 말이 '누가 릴 안 춥다고 했냐?'였을 정도니까. 서울보다 춥지 않은 겨울이라는 말에 패딩 하나 없이 견디던 릴의 추위에 진절머리가 나는 참이었다. 당시는 여행을 다니는 것에도 지쳐 있었다. 내가 속할 곳 없는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설렘을 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체력을 앗아갔다.
그즈음 혼자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출국 전에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바르셀로나는 딱히 관심이 없었음에도 따뜻한 나라라는 말에 비싼 값을 주고 티켓을 샀다. 친구들이 미리 가본 숙소, 가우디 건축물 입장권 두 개를 예약한 채로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기대가 됐다. 여행이 싫은 마음과 추위가 싫은 마음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은 추위로부터 날 탈출시켜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추위와 우울함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피곤함을 이겼다.
2018년과 2020년 런던과 뮌헨 장거리 비행 때도 창가자리를 고집했던 내가 교환학생을 하며 비행기에 대한 로망이 사라졌다. 단거리 비행은 자리를 고르는 것도 다 돈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이륙 전부터 머리만 대면 잤기 때문이다. 2시간 여의 비행 끝에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함에 감격스러웠다. 날씨 어플을 보니 16도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코트도 벗어둔 채 맨투맨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16도인데도 사람들이 패딩을 입고 있어서 신기했다. 클라라 맥주와 꿀대구를 먹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에서 분홍색, 주황색으로 변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옅은 분홍색의 하늘과 짙은 푸른색의 파도가 대비되는 게 좋았다. 파리 센강에서 혼자 노을을 바라볼 때의 기분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보니 어쩐지 외롭게 느껴지더라는~ 그렇지만 씩씩하게 이겨내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조금 일찍 하루를 마무리했다.
처음 맞는 바르셀로나의 아침! 따뜻함이 주는 행복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따뜻한 날씨만으로도 바르셀로나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첫 일정은 달스톤 커피! 교환학생을 하며 아침부터 로컬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일을 자주 했는데 한국 와서도 카페에 가려고 부지런히 아침부터 움직이는 날이 많아졌다. 이날은 스페인의 전통 커피인 코르타도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문구점에 갔다가 그냥 길을 걸었다.
가우디의 건축 카사 밀라 예약 시간 전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개선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카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 시간 전에 커피를 마신 상황이었고, 카페인에 약해 평소에 하루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 편인데 뭐에라도 홀린 듯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개선문 앞에 앉아 프랑스어로 된 이해도 못하는 노래를 들었다. 매일 변하는 내가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한 살씩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방향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걸 배웠고 그걸 이곳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그래서 이때 들었던 노래는 프랑스인 친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Bande organisée. 예약해 둔 카사 밀라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벽히 관광객 코스로 하루를 사용한 날이었다. 아쉽게도 친구들은 다들 좋았다던 사그리아 파밀리아도 나에겐 큰 감흥이 없었다. 그보다는 카사 밀라가 더 좋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고 미스 반 데어 로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보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나는 가우디보단 직선이 가득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같은 현대건축이 더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돌아보니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건축 관련 강의를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졸업해야 하는 게 아쉽게 느껴진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보고 몬주익 타워를 잠깐 들른 다음 버스를 탔다. 내려서 바르셀로나의 생활감이 가득 느껴지는 거리를 걸어 퀴멧 앤 퀴멧으로 향했다.
오픈 시간인 12시가 되어도 문을 열지 않아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했는데 주인 분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분들이 와서 서성거리니 문을 바로 열어주셨다. 덕분에 바로 들어가서 와인 한 잔과 연어 타파스, 그리고 트러플 타파스를 시켰다. 진짜 맛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바다에 가고 싶었다. 구글맵을 켰다.
여행 내내 맑은 날씨 덕에 바다에 오자마자 뻥 뚫린 푸르름을 느꼈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그림도 그리고 노래를 듣고, 햇빛 아래 냅다 드러누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낭비했다.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바다를 바라보자니 발도 담가보고 싶었다. 모래에 눕기까지 했는데 바다에 못 들어갈쏘냐! 싶어 발까지 적셨다. 차가움이 발목을 때리는 기분이 참 좋았다.
바다를 들렀다가 온 노마드 커피에서 고른 커피는 산미가 너무 강했다. 그런데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커피마저 아무래도 괜찮았다. 카페 분위기도 좋았고, 달리 할 일이 없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았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신 후 저녁을 먹고 시장에 들렀다가 일찍 귀가했다. 피곤한 상태로 온 여행이었기 때문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서 다음 날 일정을 짰다.
마지막날 아침엔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일출을 보러 왔다. 3박 4일의 일정 동안 세 번이나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이 봐서 좋았다. 바르셀로나에 가기 전에 밀리카가 바르셀로네타의 일출을 본 게 좋았다고 해서 계획했는데 전날 너무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신 탓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어쩌면 일출을 못 볼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잠에 들었다.
7시 좀 넘어서 눈이 떠졌다. 잠시 고민했지만 대충 준비하고 나와서 버스를 탔다. 해가 다 떠있을까봐 걱정했다.
사실 해가 동그랗게 떠오르는 장면을 본 게 굉장히 오래전이라 수평선 너머의 붉은색이 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도 바보 같지만 이게 해가 다 뜬 건 줄 알았다.
계속 앉아있다 보니 진짜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일 뜨는 해인데도 바다 앞에서 보는 해는 더 멋진 것 같다. 해가 주황빛을 다 드러내고 세상이 환해질 때쯤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를 조금만 늦게 탔어도 못 봤을 광경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만족스러웠다.
바르셀로나 여행은 계획이 없었고 혼자였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너무 비장해지지 말고 그냥 하라는 글을 읽었던 것도 생각난다. '꼭 해내야 해, 꼭 하고 싶어.' 같은 마음이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였다. 바르셀로나 여행에선 꼭 해내야 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계획이 틀어져서 생기는 아쉬움 같은 게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와서 바르셀로나 현지에서 나의 마음에 충분히 응답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