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에서 나답게 살아가기
도움이 필요한 지역주민들과 아이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자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이라는 나라에서 2년 반쯤 머물렀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타지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가장 ‘나 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자와 이방인 사이에 서있던 나의 모습과 소소한 감정들을 기록해보았습니다.
#1. 첫날밤
카자흐스탄 알마티 한 호텔에서 조용한 밤을 맞이한다. 지난 5월 네팔 고르카에서 마지막 밤 이후 이토록 고요한 밤은 처음이지 싶다. 한국에 다녀오긴 했나 싶기도.
내일은 타지키스탄 두샨베에 도착한다. 서른 살 한 치 앞도 모를 인생의 새로운 서막을 열어줄 그 나라. 중앙아시아의 풍경이 여전히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침내 한숨 고르고 내일을 위해 잠들 수 있는 이 밤이. 참으로 감사하다.
남겨두고 온 모든 것들 이제는 마음에 잘 넣어두고, 다가올 것들을 담기 위해 마음을 열어보자.
많이 사랑하며.
#2. Hello, stranger!
현지 직원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아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국적 잃은 언어들로 한바탕 깔깔 대며, 두둑이 배를 채운 뒤 마슈루트카(구 소련 국가들에서 대중교통으로 활용되는 작은 봉고차)에 올라탔다. 같이 가던 봉사 단원들이 먼저 내리고 현지인들 틈에 구겨 앉아 창 밖을 내다본다. 늦은 밤임에도 (사실 겨우 밤 9시지만 여기선 혼자 밖에 다니면 안 된다고 단단히 교육을 받는다) 바깥 풍경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오랜만에 겨울다운 적당한 추위도 나쁘지 않다. 늦은 밤, 나 홀로 외국인, 나만 모르는 언어들이 오가는 차 안- 무의식적으로 올라오는 약간의 긴장과 경계 태세. 홀로 여행할 때면 만끽하는 새로움과 흥분 뒤에 늘 동반되는 이 감정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제법 익숙해진 여행자의 태도라고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차가운 공기 마시며 아무도 없는 거리를 한참 걷고 싶지만 발걸음을 서둘러 집에 무사히 들어왔다.
반년 남짓 된 타지키스탄에서의 여행은, 이제 적당한 긴장과 함께 전에 누릴 수 없었던 여유도 조금씩 자리하는 것 같다.
#3. 여긴 어디
돌아왔다. 두샨베로.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 곳을 그중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며칠간 몸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아파서 울어버린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집에 오니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낯선 도시에서는 목적지로 가주세요-라고 주문을 하고 택시에 올라탄다. 그 후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 길이 맞는지, 택시기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 길이 없기에 피곤이 몰려와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법이다. 아마도 익숙하고 고요한 지금이 꿈인지, 그때 택시 안의 창밖 풍경이 꿈인지 헛갈린다.
"되풀이하지만, 인간의 고통의 궤적을 쫓아서만 하나님의 사랑 깊은 손길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분명한 것이다."
방콕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 소설집을 절반쯤 읽었는데, 머릿속에 이 구절이 자꾸만 맴돈다. 단편소설의 몰입도에 버금가는 작가의 말에 쓰인 문구다.
그래도 늘 그렇듯, 나아진다. 시간이 흘러야만 사라지는 아픔이 있다고 했다.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4. 일상과 여행의 경계
냉동실에 남은 귀한 떡국떡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맥주 한 잔 함께,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식사를 마치고 해 질 녘에 집 밖을 나서본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버리고, 드라이가 필요한 옷가지들 양 손에 들고 세탁소에 들렀다. 엔지오 아이디 카드를 보여주면 할인을 해주는데, 정해진 할인율 같은 것은 없다. 그날 주인아저씨 또는 알바 언니 마음대로. 세탁소에서 나와 조금 더 걸어 나가면 마트가 나온다. 가만 보니 참 좋은 동네에 살았다. 세탁소, 빵집, 슈퍼를 다 걸어갈 수 있다. 아무튼 요거트, 휴지, 프링글스, 맥주 등 요리 재료는 하나 없는 단골 장보기 메뉴를 담고, 참 오늘은 귤(!). 세탁소에 쏟아낸 빨랫감 대신 장바구니로 다시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온다. 그 길에 한눈에 봐도 여행객인 서양 남자가 구글맵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여행객이 드문 이곳에선 정말 낯선 장면이다. 문득 이주 전 여행지에서 내 모습이 떠오른다.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 아파트에 머문 덕분에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오늘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빵집에서 커피와 아침을 먹고, 저녁엔 마트에서 요거트와 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여행지에서나 현재 우리 동네에서나 항상 그리운 무언가가 있다는 점도 닮아있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장바구니 옆에 내려놓고 주인집 벤치에 앉아, 밤공기가 좋아서. 가만히.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