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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May 23. 2021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Santiago de Compostella-Finsterre, Fisterra : 약 90km


 늦잠을 꿈꾸며 잠들었건만, 늦잠은 개뿔, 새벽 다섯 시부터 뜬 눈이다.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뒹굴뒹굴. 아침이 이렇게 한가로웠던가. 평화로움이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왠지 짐을 싸야 할 것 같고, 배낭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할 것만 같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좋으면서 한편으로는 왜 이리 섭섭하고 아쉬울까.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낫지. 가만히 누워있으니 몸이 들썩거렸다. 결국 가방 속을 헤집어 까맣게 잊고 지냈던 화장품을 꺼내 이른 준비를 시작했다. '한 번은 쓰지 않겠어?' 했던 화장품이 이제야 빛을 본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해탈한 와중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원치 않게 아침을 일찍 맞이한 건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일찌감치 일어나 벌써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왔다며, 손에 든 바게트 하나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잘됐다. 나와, 아침이나 먹자." 


0,00km를 향하여

 

 숙소 바로 근처가 버스정류장이다 보니, 여유롭게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표를 샀다. 드디어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피스테라 (Fisterra, Finisterre)로. 라틴어 '끝(Finis)'과 '땅(Terrae)'에서 유래되어 '땅 끝'이라고 불려 온 곳이었다. 사실 순례길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지만, 조금 더 가고자 한다면, 묵시아(Muxia)와 피스테라(Fisterra)까지 갈 수 있다. 나의 마지막 종착지는 피스테라였다.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 0km가 적혀있는 비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기어이 하루를 단축했다. 비록 산티아고에서 약 90km가 떨어진 곳이었지만, 0.00km가 새겨져 있는 돌비석을 꼭 눈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보고 싶었다.


 편도로만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생각보다 버스에 사람이 꽤 있었다. 마을을 도는 버스라서 그런지 순례자들 외에도 마을 주민들이 많이 타고 내렸다. 구릿한 날씨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내릴 때가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나고 날이 좋아졌다. 역시 스페인 날씨다웠다.


세상의 끝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하나, 주서기와 다시 만났다. 참 대단한 친구. 피스테라에서 보자며, 90km를 단숨에 걸어간 친구다.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바로 비석을 향해 걸었다. 마을을 지나 올라가니, 왼쪽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탁 트인 풍경과 바다의 푸른빛을 보다 보니, 부산에 있는 태종대가 떠올랐다. 규모는 이 쪽이 훨씬 컸지만,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 그리고 푸른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순식간에 3km를 걸어 도착했다. 홀로 우뚝 서있는 0,00km. 비석을 보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이제 정말 다 봤구나.'


한동안 주위도 둘러보고, 서로 인생 샷도 찍어주겠다며 사진도 찍고, 각자의 방식으로 순간을 담았다. 다 보고 내려오니 딱 맥주 한 잔 할 시간이 남았고, 눈 앞의 풍경을 안주 삼으니 맥주가 술술 들어갔다.


맥주 한 잔의 기운 탓인지, 돌아올 때 더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버스는 아주 정직하게 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우리를 놓아주었다. 내릴 즈음, 전화가 울렸다.


"어디야?"


어둠 속의 대성당을 보러 가려다가,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는 혜니 언니의 소식을 듣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밤의 대성당

 생장에서부터 시작된 인연들과 함께하는 마무리라니. 언제 또 모두가 모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산티아고에서 꼭 만나자며 약속했는데,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다가오는 이별의 아쉬움을 잠시 묻어둔 채, 화려한 만찬으로 상을 하나둘 채우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기쁨과, 서로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상 가득해졌다.


 우리가 어떤 민족이던가, 흥의 민족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알베르게 주인도, 주변에 있던 다른 순례자들도 모아 모아 모두 함께 어울렸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만났을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흥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 웃음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다 같이 함께하는 만찬


 막연하게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꿈같은 한 달이었고, 혼자였던 시간, 함께였던 시간, 모든 순간들이 소중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시간들이었다. 스스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먹었고, 걷고 싶으면 걸었고, 쉬고 싶으면 쉬었고, 대화를 하고 싶으면 대화를 나눴다.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시간들을 보냈다.


 이 소중한 지금을 뒤로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돌아갈 곳이 있기에 이 순간들이 더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금방 이 시간들을 그리워하겠지만, 이 추억의 순간들은 잘게 나뉘어 몸 곳곳에, 깊숙이 새겨져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를 것 같다.  


 걷는 순간들은 다채로웠고, 그 무지개 속을 맘껏 누빌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물집이 잡히고 넘어져도 웃음이 새어났고, 웃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사실 순례길을 걷기 전과 후가 얼마나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마음속에 기쁨이 한껏 차올랐을 뿐이다. 이 기쁨을 안고 일상을 살아간다면, 조금 더 밝게 하루를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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