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8> 어떤 글이 사람의 관심을 끌까
글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했다. 남들이 볼 수 있기 이전이라면 그 글은 남들이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 ‘일기’가 그렇다. 하지만 공개된 글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설혹 공개하기 원치 않더라도 공개되어 많은 주목을 끄는 글도 있다.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가 그런 책이다. 일기는 남들이 보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공개될 것을 전제로하 한 글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기가 숙제가 되고, ‘잘 썼어요’라는 도장까지 찍히는 만큼 일기도 공개될 여지가 있다. 때문에 아이때부터 본능적으로 일기조차 남들에게 주목받기 원한다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한 소녀의 일기가 검찰의 손에서 놀아날 만큼 이상한 행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SNS가 활발해지면서 일기와 공개되는 기록이 갈수록 모호해지는 경향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기라는 카테고리로 만들어서 쓰는 경우가 있다. 필자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일상에 관한 글을 쓴다. 신변 잡기부터 독서일기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 글은 내 가장 가까운 지인들이 읽을 것을 알고 쓴다. 아니 읽어주었으면 하면서 쓴다. 때문에 ‘좋아요’가 적고, 댓글이 적으면 섭섭해진다.
페이스북 이전에도 이런 습관은 있었다. 내가 공개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4학년인 1995년 PC통신 하이텔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나는 하이텔 문학공간에 서평이나 소설을 쓰기도 했고, 플라자 같은 자유게시공간에 사회에 관한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어떤 글이 많이 읽히는 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물론 아는 것과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 수많은 글을 쓰고, 17권의 단행본을 냈지만, 정작 독자들에게 열렬히 사랑받은 글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간의 감으로 어떤 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인가 정도는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자기도 겪을 법한 사생활에 흥미를 갖는다
좀 표현은 과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음증을 갖고 있다. 남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지만, 본능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의 사생활이라면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연애인이나 정치인의 사생활은 엄청난 관심거리다. 창간 목적이 이런 파파라치인 매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정론직필을 내세울지 모르지만, 정론의 방향이 사생활이라면 할말이 없다. 물론 사회에 영향을 주는 인물의 사생활은 공공의 알권리가 연결되기 때문에 대부분 문제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사생활이 아니더라도 남들의 사적인 부분은 관심을 끌기에 부족하지 않다. 사실 소설이라는 장르 중에 상당수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다. 역사나 정치,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소설을 끌어가는 힘 중에 하나는 사생활이다. 조정래 작가의 대작 <태백산맥>에서 악역 염상구와 외서댁의 묘연한 관계 등 생생한 사람들의 사생활이 없다면 소설은 훨씬 힘이 없었을 것이다.
1995년에 하이텔에 서평을 써서 제법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나는 서평에 내 이야기를 많이 썼다. 책 이야기만으로 너무 심심해서, 내 경험과 책의 내용을 엮었다. 심지어는 그 당시 내가 만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간간히 담기도 했다. 실제로 몇 번의 실연담이 서평 속에 녹아있기도 하다. 그래서 만은 아니겠지만 내 서평은 제법 인기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이순원, 박상우 등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서 문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1998년부터는 문학웹진 ‘문예평론’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물론 전업은 아니었다. 이때 한강, 나희덕, 은희경 등 내가 관심이 있던 작가를 만나서 인터뷰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활동은 1999년 9월 결혼과 더불어 중국으로 가면서 끊어졌다. 이렇게 자신이 겪을 법한 사생활을 쓰는 글은 나쁘지 않다. 결국 이런 글들이 더 깊어지면 문학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내가 쓰는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리는 글은 당연히 내 신상에 관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2년에 한번 꼴로 직업을 바꾸었다. 2015년에 새만금개발청에 나왔고, 이후 인민일보 한국대표처, 차이나리뷰 편집장을 하다가 2017년 여름에 보성그룹 상무로 맡았다. 2019년 12월 말까지 일했고, 2020년 7월부터는 춘천시 시민소통담당관을 맡았다. 이후 1년 2개월만에 이 일을 던지고 나왔다. 노마드를 표방한다지만 다양한 직장을 다니는 내 여정에 사람들은 흥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동정을 쓰는 포스팅에는 수많은 좋아요와 응원 댓글이 달린다. 물론 이를 위해 직업을 바꿀 리는 만무하다. 다 사정이 있다. 또 다른 직장에 가는 것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 이런 글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 이유는 당연하다. 큰 이벤트니, 뭔가 축하를 해줄 수 있다는 이유일 것이다. 아울러 자신들이 잘 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직장 옮기기에 찬사를 보내는 표현일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는 이에게 관심을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대리만족이면서,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마음을 표시하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살아있는 이야기다. 반면에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이야기에도 많은 반응을 보인다. 가령 여행, 음식, 가족 등 모두가 살아가는 모습 중에 하나지만, 그런 이야기를 보면 즐겁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령 내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반응이 좋다. 당연하다. 나도 페친들이 가족의 여유로운 모습을 올려 놓으면 좋아요를 당연히 누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감성적인 글을 좋아한다
“모기와 혈투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아침. 고향을 향하는 기러기들의 웅성임에 밖을 본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타고 나는 저들의 본능이 놀랍다. 무슨 에너지가 가는 길 수만리 동안 떠들 수 있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저들의 귀항은 인간의 파괴로 머지 않아 끝날 수도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인간의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10년안에 지구는 티핑포인트(임계점)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영화 2012 같은 재앙이 올 수 있다.”(필자 페이스북 2020년 10월 11일)
“그런데 작가는 움직이는 환자용 침대를 따라 아이가 가져온 신발을 신어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하지만 작가의 따뜻한 동화와 시들은 여전히 유효하게 아이와 어른을 잇고, 땅과 하늘을 잇고 있다.”라는 내 글이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채봉 작가의 서평 글이었다.(필자 페이스북 2021년 1월 16일)
난 감성적인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래서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글을 쓰는데, 위의 글이 그렇다. 감성적인 글을 쓴다고 억지로 단어를 끄집어내는 것은 권한지 않는 편이다. 억지로 끄집어낸 감성은 읽는 이가 금방 알기 때문이다. 감성의 대가는 시인들이다. 선사시대 무속인들은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무(巫)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두사람을 표현한다고 한다. 시인들은 하늘의 소리를 읽고, 언어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들을 경이롭게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사실 이 영역은 그냥 배워서 되는 부분을 아니다. 그냥 하늘이 주는 재주로 보는 게 옳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계절이 바뀌거나, 날씨에 따라서는 최대한 감성을 살리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통상 비가 오는 날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있는 만큼 감성을 살리기에 좋은 시간이고 생각한다.
여행쪽에 대가인 알랭드 보통은 이동하는 시간이 감성이 잘 솟아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비행기를 주로 말했다. 역마살이 있는 만큼 나는 비행기는 물론이고 기차나 고속버스 창에 기대면 가장 감정이 살아난다. 스무살 무렵에는 어느 추운날 김서린 버스 창가에 이백의 ‘정야사’(靜夜思)를 적었던 기억이 있다.(침상 머리에 밝은 달빛牀前明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런가疑是地上霜, 머리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다擧頭望明月,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低頭思故鄕)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감성적인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은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와 비가 올 때다. 또 꽃이 필 때와 안개가 끼는 환절기 같이 오랜 만에 찾아오는 감성의 순간도 있다. 사진도 해뜰 때와 해질 때가 가장 빛이 신비하듯, 글도 이런 시간을 묘사하면 감성적일 수 밖에 없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글쓰기에도 당연히 작용한다. 이런 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 글을 쓰면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 또 감성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평상시에 시집을 읽어야 한다. 글을 바로 나오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입력된 수많은 단어들이 어느 순간에 자기화되어 잘 풀려나오는 순간이 감성적인 글쓰기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감성적인 글에 집착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이야기가 있는 글이 좋다
필자가 이 글을 쓸 때,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말했다. 바로 책 속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좋았다는 이유였다. 초등학교 때 누나에게 선물받아 읽은 <삼총사>에서는 달타냥과 삼총사 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좋았다. 특히 우정이나 사랑은 당연히 최고다. 춘향전의 극적인 이야기는 지금 세상을 매료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보다가도 스토리가 개입하면 관심이 더 올라간다. 피천득의 ‘인연’은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로 시작한다. 뭔가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읽는 순간부터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로 시작하는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글을 쓸 때 첫문장을 쓰기를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때문에 계속해서 첫 문장을 바꾸는 작가들도 많다.
가장 좋은 시작은 그 한 문장으로 소설 전체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직접적일 필요는 없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직유적인 표현을 썼지만 어느 소설보다 좋은 시작으로 꼽힌다. 작가는 이 문장을 쓸 때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도 좋은 시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넘어 좋은 글은 선한 글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선한 글은 선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글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난다. 손가락 끝이 묻혀 나오면 지문(指紋)이 되듯, 글이나 그림, 혹은 음악에도 무늬가 있다. 그래서 글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볼 때도 무늬를 느낄 수 있다. 당연히 그 무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한 사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또 사람들은 성숙한 글의 무늬를 보고 환호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선물할 때, 써준 글의 무늬를 참 좋아한다. 아래는 추사가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의 발문이다.
“지난 해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책을 부쳐 주었다. 이 책은 모두 세상에서 항상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 얻은 것으로 한 때에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또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력과 이익만을 쫓는다. 이렇게 마음과 힘을 이렇게 얻은 책들을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고, 바다 건너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중인 사람에게 주었다. 세상에서 권력과 이익을 쫓는 자들과 같도록 해주었다.(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태사공(사마천)은 “권세나 이익을 따르는 사람은 권세와 이익이 바닥나면 교류는 소원해진다.”고 했다. 그대 또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초연하게 스스로 도도하게 권세와 이익을 쫓는 이들에게 벗어나, 나를 봄에 권세와 이익의 눈으로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공자께서는 “가장 추운 때가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음을 안다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 늘 시들지 않는다. 가장 추운 때 이전의 소나무와 잣나무야 이 시기 이후에도 그렇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가장 추운 시절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칭찬하셨다.(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松柏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이나 뒤가 다르지 않고, 곤경을 겪은 후에도 소홀해짐이 없다. 때문에 내가 곤경해주기 전에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겠지만, 그 뒤에 그대는 칭찬할 만하다. 성인은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또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다.(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오호라.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를 살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도 빈객들이 그들의 성쇄를 따랐다. 하비(下邳)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써 붙여, 세태를 풍자한 것은 박절한 것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슬프구나. 완당 노인 씀(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