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발자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생 Oct 26. 2019

스탠바이(Stand-by)는 이제 그만

항공사 이야기와 한숨


졸업 후 항공사 지상직원으로 일했을 때 스탠바이(Stand-by: 영어로 직역하면 '대기') 규정이 있었다. 승객 입장에서 마일리지 좌석 업그레이드 대기자가 되었을 때 들어봤을 수도 있다. 근데 그것보단 '스탠바이, 큐!' 하는 방송 용어가 더 익숙지 않을까 싶다.


항공 업계에서는 노쇼 승객(No-show: 좌석 예약은 했으나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은 승객)으로 예약석이 공석이 될 때, 그 자리로 업그레이드를 원하는 스탠바이 승객이 좌석을 얻는 상황이 일반적이다. 스탠바이가 여럿일 땐, 마일리지와 티켓 등급 등에 따라 우선순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좌석을 받는다.


직원이 이용하는 스탠바이 규정도 이와 유사하다. 자리가 남아야 자리를 받는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직원 혜택으로 공항세 혹은 그 이상이지만 낮은 비용으로 당사 비행기를 무제한 탈 수 있었는데, 위에 설명한 스탠바이 예약을 통해서만 이었다. (확정 티켓을 1년에 몇 회 받는 항공사도 있다)


그런데 말 그대로 ‘대기자’기 때문에 비행기 예약 상황, 실제 탑승객 수, 스탠바이하는 직원의 등급(?)에 따라 내 좌석은 없을 수도 있다. 예시를 들어 설명하면,




1. 이상적인 시나리오

예약자가 적다 -> 1등석으로 스탠바이 예약을 건다 -> 1등석이 여러 석 비었다 -> 1등석 티켓을 받는다


2. 아쉬운 경우

(같은 상황) -> 1등석이 여러 석 비었다 -> 근데 나 같은 직원(1등석 스탠바이 예약자)이 남은 1등석 수보다 많다 -> 직원 리스트를 확인한다 -> 기장, 부기장, 기본 10년 이상 크루들이 깔려있다 -> 나는 1등석 스탠바이 순위에서 밀려난다 -> 비지니스 혹은 이코노미석을 받는다


3. 최악의 상황

떠나기 전 확인했을 때보다 예약자가 갑자기 불어났다 -> 귀국 후 출근은 해야 하므로 그래도 도전한다 -> 이코노미만 10자리 남았다 -> 이코노미석 스탠바이 예약을 건다 -> (초조하게) 직원 리스트를 확인한다 -> 기장, 부기장, 기본 10년 이상 크루들이 10명 깔려있다, 나는 11번째다 -> 노쇼 승객이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끝까지 기다린다 -> 승객이 전원 탑승한다 -> 내 앞 직원까지 이코노미 좌석을 받는다, 눈앞에서 비행기 문이 닫힌다


-> 다음 비행기가 있다면 위 과정 반복 / 다른 노선을 거쳐 갈 수 있는 예약 상황이라면 경유지와 최종 목적지 스탠바이 예약 /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공항 노숙 / 당장 입국해야 한다면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다






더 복잡하고 스릴 넘치는 상황이 많지만 대략 위와 같다. 재미난 기억을 되살리니 웃음이 나온다.


스탠바이 때문에 여러 공항에서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서 노숙할 땐 게이트 근처에서 캐리어를 바짝 당겨 베개 삼아 잤다. 또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어쩌다 옆 좌석에 직원이 타면 오피스까지 방문해가며 수다를 떨었다. 무엇보다 잘 한 건 퇴사 전 엄마를 모시고 미국 서부 여행을 다녀온 일이다. (물론 엄마도 스탠바이로)



자주 노숙했던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가장 좋아했던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
재밌는 조각품들이 많았다



이외에도, 당시엔 일일 뿐이었던 게 다시는 못 겪을 추억이다. 항공기 테러 방지를 위해 승객으로 위장하는 에어 마샬(여객기 보안요원)이 그땐 친근했다. (퇴사 후에 영화에서 보고 그들이 무섭다는 걸 알았다) 파병 중 전사한 미군 시신을 비행기에 호송하기 위해 서류에 사인하는 동료의 얼굴을 읽던 일, 입국 심사 문제로 꼼짝없이 공항에 갇혀 지내게 된 사람의 호소를 듣는 일이라든지. 지저분한 기억도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런 건 이제 희미하게 둔다.





여기까지 장황하게 항공사 이야기를 풀어놓은 건 문득 스탠바이와 나 사이 발견한 지점을 쓰고 싶어서다. ‘Stand-by’라고 적힌 티켓을 쥐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나라는 생각이다. 우선권을 쥔 사람들로부터 쭉쭉 밀리고, 정해진 노선 없이 상황 따라 노선을 택했던 모양새가. 전자는 경쟁 사회에서 불가피한 경험이겠지만 내가 맘에 안 드는 건 후자다.


입사했을 때 내가 막내였다. 원치 않게 칼 졸업을 해서 어딜 가던 그랬다. 거기서 누군가는 일찌감치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누군가는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했고, 누군가는 회사에 계속 남아 이제 고참이다. 막내일 때야, 아직 어려서 경험 더 쌓아도 돼~ 했지만 지금은...


전 회사에서 내 얘기가 나온다면 다들 뭐라고 할까? '글쎄, 캐나다 가지 않았어? 아냐, 돌아와서 애들 가르치는 일 하다가 지금은 쉬는 것 같던데 잘 모르겠네.' 이 정도일 것 같다. 내 노선은 미정. 나는 아직도 스탠바이 티켓을 쥔 채 이 노선으로 가네 저 노선으로 가네 하는 거다.


다들 자기 노선을 정했는데,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또 어떤 노선도 확정된 게 없는 것이, 스탠바이 비유가 꼭 들어맞는다.





인천 국제공항 국제선 같은 경우 하루에 한 노선만 운항하는 외항사도, 2개 정도의 허브 공항만 운항하는 항공사도, 한 나라의 크고 작은 도시들만 집중 운항하는 곳도 있다. 국내선은 정해진 요일에만 운항하는 곳도 많다.


도대체 나는 어떤 노선을 향해 가고 싶은 건지 아직 모르겠다. 한 노선은 정기로, 어느 노선은 비정기로 운항해볼 수 있다. 신규 취항을 할 수도 있고, 허브 공항으로 향하는 노선을 거점으로 가지 치는 노선을 만들 수도 있다.


여러 방법과 노선이 즐비한데,

아직 Stand-by 티켓만 꼭 쥐고 있다. 답답하다.


지금껏 스탠바이 여행자로서 등 떠밀려 노선을 택했고, 그게 싫다고 이젠 내가 선택하고 싶다고 맘먹었는데, 선택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머리가 아픈 요즘이다. 일단 가봐야지, 가보고 아니면 거기서 조금씩 방향을 틀어 뻗어 나가면 되지! 라고 매일 찾아보는 책과 강연자마다 친절히 알려주는데 말이다. 자꾸 주춤하는 건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한재우,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에 이런 표현이 있다.


삶에 놓인 눈금은 0에서 1 사이가 가장 멀다는 사실을
처음의 한 번을 해내는 것이 그 뒤의 몇십 번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0에서 1 사이가 원래 가장 멀다. 가장 어렵다.

처음의 그 한 번, 한 노선을 가 보아야 한다.

스탠바이(Stand-by)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








아직 분실 상태

https://brunch.co.kr/@amournuna/128



매거진의 이전글 산 같이 살게 될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