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나는 _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답하는 두 번째 편지
2일 차 주제. '본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정체성'
오늘 주제는 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를 찾는 여행 중이기도 하고.
내 옆에 따라붙는 건 분명 #그림 이겠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보다는, 그림이 익숙한 사람에 걸맞은 건 아닐까다.
일로써의 그림은 가르치는 일 뿐이기도 했고, 대학 시절 혹은 입시를 목표로 그렸던 그림은 정답에 맞추느라 나만의 그림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림과 나 사이 애매한 기류. 그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말하기 뭐하다 고백한다.
애매한 기류
그림과 나 사이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은 이제는 자유롭고 싶다는 내 소망과 연결돼있다. 더 솔직하게는 압박 회피.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글쓰기나 심리학 분야 독서등 다른 작업에 할애하는 시간이 더 많다.
소위 전문가들은 내가 꼼지락 거리는 글이나 작업물을 보고 비웃을 수 있겠지만,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지속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즐겁다. 더 잘하고 싶다. 비교가 잘 안되니까 위축이 안 된다. 절대적 시간을 더 들인다. 약간의 발전도 기쁘다.
이와 관련해 몇 주 전 예시 하나가 생겼다. 미싱을 조금 배웠었다. 공방 선생님께 이 말씀을 드리니까 크게 웃으셨는데 내 질문은 아래와 같다.
"선생님, 문제는 제 눈에 이게(미싱 박음질) 어디가 틀렸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밖에서 파는 물건이랑 제가 한 거랑 큰 차이를 모르겠어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여기서 깨달은 진리.
모르면 맘이 편하고 맘이 편하면 자신감이 깎일 일도 없다. 자신감이 넘치진 않을지라도 마이너스(-)는 아닌 상태. 더닝 크루거 효과, 무식이 용감하다는 말처럼. 이제는 서툰 미싱질이 아주 잘 보이긴 하지만 처음에는 뭐가 잘못 돼가고 있는 지를 모르는 채로 계속하다, 다 뜯어내야 할 타이밍을 놓쳐 끝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완성품은 계속 나오더라.
틀린 것 투성이었지만 만드는 과정을 온전히 즐겼다. ‘나는 B급 컨셉’이라며 완벽한 공예품 옆에 내 것을 놓고 굳이 비교하지 않으니 압박은 제로다.
그림은 이 모든 게 반대다.
도움 안 되는 확대경
미싱을 대할 때 폴폴 풍기는 뇌적 순수함과는 반대로 내 그림은 아주 작은 허점도 확대경으로 보듯 한다.
전문성을 지녀야 하는 일에 당연히 마주하는 단계다. 그걸 알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열정이 사그라든다, 노력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밖에 못한다는 게 부끄럽다. 잘 그려야 하는 그림에 거부감이 든다. 입시 영향이다. 채찍질당하듯 만들어낸 그림, 실력 이런 건 다 잊고 싶다. 마음이 멀어지고 그림과 보내는 시간도 줄어든다. 잘 그리지는 못하고 스타일도 없다. 손은 점점 더 굳고 이내 외면한다.
위 과정을 반복했다.
아이 그림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아이 그림을 줄곧 좋아해 왔다. 수업 때 아무것도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맘껏 자신을 표현할 환경 조성에는 갖은 애를 썼는데 학교, 학부모 눈이 나와 같지만은 않다. 학교에선 특히 정해진 틀이 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이론이 싫고 그게 베어 나오는 내 작업은 더 싫었다.
(예를 들어 투시에 맞게 형태를 똑바로 그리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삐뚤빼뚤 투시 알못 그림이 좋다)
가깝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그림.
우리는 그렇게 탈 많았던 애매한 관계다.
그런 탓에 그림으로 얻는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수업을 그만둔 동시에 내 안에 가득했던 정답들을 내려놓고부터는 아주 옛날에 느꼈던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수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랜 시간 이런 식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유할 줄 몰라 문드러진 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틀린 그림'을 자꾸 그린다.
하지만 나는 그걸 내 그림이라 말한다.
‘그래야만 한다’가 사라지니
위로받고 싶을 때도 그림을 찾는다.
이래서 그림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가 다음 난제다.
우리 사이 어색하게 흐르는
애매한 기류가 좀 정리되면
그때는 그림이 됐든 그림+a가 되었든
‘나는 _하는 사람입니다' 확실히 말할게.
나를 찾는 여행 중,
내일은 세 번째 편지를 씁니다.
https://brunch.co.kr/@chograss/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