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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 ChoHeun May 20. 2023

나는 왜 작가의 이혼 사유에 집착하는가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



   

 테라로사를 왼편에 바라보며 예술의전당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과 시각, 공기와 온도, 찰나의 것들이 행위에 자연스레 와서 붙는다. 유리문을 민다거나 단걸음에 코너를 돈다거나 기대에 들뜬 보폭 같은 것이. 어디 한두 번 방문으로는 입구를 찾는 일도 쉽지 않은 내게 뭉근히 익숙해진 이곳의 기운. 전시 좀 다녀본 소박한 내공 같은 것. 혼자만 아는 것. 그때부터 이미 기분이 좋았다.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 전시 제목과 함께 입구를 샛노랗게 밝히는 대형 패널 속 여자의 그림이 시선을 압도한다. 세다. 그동안 예술가의 뮤즈로서 본 적 없는 강한 표정, 찍어낸 듯 균일하고 두텁게 칠해진 쨍한 배경색이 인상적이다. 단연 세 보이는 여자, 뒤피의 ‘전처’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초입에 걸린 ‘에밀리엔느 뒤피의 초상(1930)’을 직접 만날 수 있다. 과연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맞은 편에 걸린 또 다른 여인의 초상이다.


 20년의 시간 차를 지닌 ‘보스턴의 베르트(1950)’라는 작품이다. 손이 가는 대로 붓질한 듯한 엷은 배경 속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평범한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말년의 뒤피가 관절염으로 고생할 당시 곁에서 수발한 간호인, 혹은 여자친구로 언급되기도 한다. 나의 시선에만 그런 것인지 그녀의 수수한 옷 섬 사이 가슴께에 착시처럼 존재하는 하트의 형상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뒤피의 멋들어진 싸인 옆으로 Berthe의 이름자가 은은하게 어우러진다. 작품에는 화가의 이름만 새긴 것으로 보아왔기에 흥미로운 발견 뒤에 몸을 돌려 에밀리엔느의 초상을 낱낱이 살폈지만 그녀의 이름은 화폭 안에 찾을 수 없었다.     


 문득 호기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뒤피는 어째서 에밀리엔느와 이혼한 것일까. 짐작건데 그녀는 화려하고 강인했지만 예술가인 남편으로서 감당하기엔 기운이 억센 여자였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순전히 그림 두 점을 놓고 주워 모은 상상들이었다. 괜한 오기가 생겨 집에 와서도 한참을 뒤피의 아내에 대해 검색했지만 별다른 자료는 얻지 못했다.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예술혼과 워커홀릭, 무엇이 먼저일지 모를 초인적 열정이 뒤섞여 유례없는 다작을 했던 프랑스의 화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만에 한국이라는 생에 온 적 없는 나라에서 (어쩌면 안 좋게 헤어졌을지 모를) 전처의 초상을 내걸고 회고전을 한다는 것이. 관람객들은 온전히 그 색채와 표현에 아름다움으로 감응한다는 것이, 삶이란 결국 살아서도 죽어서도 알 수 없는 절묘한 것이란 생각을 했다.                




*

 우리는 왜 작가의 삶을 알아야 하는가. 아직은 여전히, 낯선 명성과 아는 작품 한 점 없는 순도 백 프로의 무지함으로 전시장을 찾는다. 허기를 견디는 일이 가장 힘든 사람으로서 모든 그림을 충실히 마주하기 위한 결연한 마음에 단단히 아침을 먹고 전투력이라도 챙긴 것으로 그 무례함을 대신했다. 3시간 반을 꼬박 둘러 보고서야 격한 배고픔을 감지하고 출구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을 때 거울 속 퀭한 모습에 흠칫 놀란다. 찐으로 진이 빠진 듯한 몰골에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열중하게 만든 걸까. 일생을 쉼 없는 작업에 모두 바친 예술 정신에 완전히 압도된 걸까.      




 ‘도대체 이 아저씨 얼마나 많은 일을 한거야.’ 덩달아 숨이 차는 듯 했다. 잠시 날 것의 표현을 옮기자면 전시를 보는 내내 그러했다. 작품 간 다채로운 형상과 물량 공세부터가 이미 남달랐다. 젊어서 먹고살고자 삽화를 그렸고, 판화가이자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늘 새로운 기법과 접근 방식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컸던 뒤피는 체질상 하나의 미술사조에 머무르지 못했다. 인상주의에서 야수파, 입체파로 전능하게 넘나들었다. 화가로서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혁신을 시도하며 기술과 예술을 통합하는 창의적이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시대적 유산을 남긴 그는 워커홀릭이자 진정 천재였다. 그의 유화, 수채화, 판화, 삽화, 직물 패턴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것이어서 얼마나 쉬지 않고 평생을 들어 작품 활동에 몰두했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었다. 전시된 일러스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지극히 세련되고 감각적이었으며,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리다 만 듯 색을 흩어 놓은 수채화는 눈 뗄 수 없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삶은 언제나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삶이 미소 짓지 않던 순간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그의 삶에 있어 가난과 전쟁, 이혼과 투병 같은 것이 얼마만큼의 어떤 아픔이었을지 미처 알 수 없지만 그가 미소 짓지 않는 삶에 화답한 방식만큼은 알 것 같았다. 쉼 없이 예술을 했던 것. 창작을 했던 것.

 그는 말한다. "나를 둘러싼 주변 모든 것이 곧 예술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감동을 받고 느끼는 바로 그것이 곧 당신에게 예술"이라고. 어쩌면 내가 가고 있는 길 또한 그가 말한 예술의 어느 모퉁이기를. 돌아서 만나기를. 그림과 화가는 오늘도 뜻밖에 나의 그런 위로가 되어 준다.



               

 전처의 얼굴을 걸고 서울에서 회고전을 여는 프랑스 작가의 삶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할까. 생각이 좀처럼 확장되지 않는 답답함에 문득 인물전 시리즈에 푹 빠져있는 아홉 살 딸에게 물었다.      


 “기쁨이는 세종대왕, 정조 같은 책들이 왜 좋은거야?”

 “음. 읽다 보면 역사를 알 수 있어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유 비슷한 것을 만들어낸다.     


 “그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없.다. 몰라?”

 “하하하. 그런 거 말고. 네 생각.”

 “그냥 재밌잖아. 재밌어서 보는건데.”     


 딸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는 듯이 퀵보드를 타고 쌩 앞서간다. 어른에게 제법 깨우침 같은 것을 던지고 무심한 듯 날렵한 몸놀림으로 한발을 굴러서 간다. 그렇다. 어쩌면 예술은 ‘무용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현실의 내가 아닌 새로운 발상과 정체성을 만나는 시간.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인들 결국 신이 아닌 이상 같은 인간 아니던가. 누구는 천재가 되어 마스터피스를 남기며 또 다른 누구인 나는 오늘도 복직과 퇴사의 카드 단 두 장을 들고서 어지러운 마음을 헤맨다. 나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 한계를 실험해 본 적 있는가. 어느 강연에서 적어 둔 김영하 작가의 말이 알맞게 스친다.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로 태어나 학생이나 노동자로 훈육된다." 내 안에 발휘되지 못한 천재성 같은 것이 아직 살아있을까. 여기서 그 한발을 새로 떼어도 될까. 자못 궁금해졌다.




 뒤피가 ‘기쁨의 화가’이자 ‘위대한 색채주의자’로 불린 것은 다수의 20세기 회화와는 달리 그의 그림에는 어떠한 트라우마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비현실 속에 살게 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의 삶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색깔을 위한 투쟁,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나는 지금껏 본질을 위한 그 어떤 투쟁을 삶에 던져 주었던가. 가치로운 것을 좀 더 가치 있게 품고 나가도 괜찮다는 자그마한 확신을 다시 붙잡아본다.






 어느 때보다 오래 들여 긴 글을 썼다. 그 일련의 행위와 사고와 모든 순간이, 내가 작가의 여인들에 집착하고 그의 삶을 알아야했던 이유라고 생각을 매듭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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