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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 ChoHeun Jun 06. 2023

엄마까지 전시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안도 타다오 '청춘'

 

 천재지변으로 약속된 해외 일정이 틀어지고, 황금연휴인 탓에 마땅찮은 숙소를 전전하며, 우리는 여행을 했다. 낼모레 칠순이 가까운 아빠부터 겨우 첫 생일이 지나지 않은 두 살배기 조카까지 제법 가족 ‘군단’의 모습을 갖추고. 미처 계획 없던 길을 나섰다. 가장 큰 변수는 날씨였다. 비가 쏟아지자 아이들과 바닷가를 산책하고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일에 제약이 많았다. 식당마다 원산지부터 확인하는 까탈스러운 나 사람 때문에도 ‘제약’이 커졌다. (마침 생일을 맞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모두가 허기를 참고 번거롭게 식사 장소를 바꾸어야 했을 때, 좌충우돌이라며 웃어넘기는 아홉 명 중에는 분명 웃기지 않은 누군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짝을 바꾸어 손을 잡고 동해로 산으로 유랑단처럼 추억을 나누며 두 밤을 보냈다.     


 돌아오는 날, 안도 타다오의 전시가 있는 뮤지엄 산으로 향했다. 궂은 날씨와 북적이는 관람객들로 서로를 놓칠세라 정신이 곤두섰다. 내 고집이었다. 조예랄 것은 없지만 새로운 자극에 적극적이고 남다른 직관을 가진 아빠는 일단 걱정 밖이었다. 접근이 쉽지 않을 뿐, 세계적인 건축가의 조형과 전시를 보는 것은 대중 누구에게나 보편의 감응이 되주리라 믿었다. 인생 최대 목표가 신속 효율인 우리 엄마에게 웅장하고 수려한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욕심처럼 앞섰다. ‘자식들하고 나오니 이런데도 와보지, 엄마 좋지요?’ 나는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낮은 기온과 내리는 부슬비에 제3의 손처럼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붙들고, 예술 좀 보러 다닌 듯한 인파 속에 어린 손녀들을 챙기며, 10키로가 넘는 제 자식을 어깨에 멘 막내딸이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엄마는 회색 공간을 묵묵히 견뎠다. 입장료는 뭐 그리 비싼지, 빨간 고철 밑에 줄 서서 사진을 찍어 대는지, 엄마는 아무 관심 없을 걸 가족 모두가 알았지만 내가 좋은 곳이라 하니, 아이들이 판화 공방 체험을 하고 싶다니, 짐을 지키며 그저 기다린다. 엄마가 보고 좋았던 것은 가장 유명한 포토 스팟 건너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와, 이 꽃은 이런 색 찾기 힘든 건데, 참 예쁘다.” 엄마가 유일하게 감응한 것이었다.     





 청춘이란 삶의 한 시절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 그런게 아니다.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읽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이 피부를 주름지게 할지는 몰라도, 열정을 포기한다면 영혼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겠지. 걱정, 두려움, 자기 불신이 마음을 숙이고 영혼을 먼지로 되돌리기에.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인간 마음속에는 경이로운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 그리고 저마다 인생의 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 … - 사무엘 올만    



  적어도 나의 서른아홉은 스물아홉보다 청춘이라 믿고 싶다. 엄마의 열망은 무엇이었을까. 공부 말고 예술 할 걸 그랬다는 나의 후회처럼, 살림 말고 하고 싶었던 예순둘 엄마의 아쉬움은 없을까. 내게 엄마는 늘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분이다. 전시 같은 것을 볼 줄 아는 멋은 없어도 당당하고 즐거움이 많은 사람이다. 거창한 이상을 품지 않고도 가족과 건강, 행복 같은 분명한 가치를 좇아 어느 청춘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엄마의 열정은, 언제나 넘쳐서 문제다. 그런 엄마에게 용기와 동경, 모험과 감수성을 논하며 인생이라는 링 위에 승부를 갈라야 할까.


 엄마까지 전시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예술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전시장을 나오며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먹고사는 현실과 꿈같은 이상 사이 무엇을 쥐려 하는 건지 희미해졌다. 흔들렸다. 나는 정말 안이함을 뿌리치는 탁월한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제 와 그래야 할까. 아직 퇴직서를 내지 않은 사실에 또다시 마음을 기웃거려 본다.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직면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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