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승 Jun 30. 2022

00. 출발점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거울 속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벼운 챙모자를 걸친 내가 보인다. 곧은 자세를 하고 있지만 표정은 죽어있다. 억지로 웃어본다. 지금 행색과는 맞지 않은 어색함에 다시 입을 내리고 현관문을 나선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집에서 몽파르나스 역까지 도보로 2km. 날씨는 전반적으로 맑음. 최고 온도 26도, 바람 조금. 집과 몽파르나스 역 사이를 자주 오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낯선 길은 아니다. 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오래된 프랑스식 건물들과 멀리서 들려오는 프랑스어. 무단 횡단을 하던 보행자와 그 앞에 급정거한 차 주인이 서로 말다툼하는 소리. 그리 새롭지 않은 광경들이 스쳐 간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 사랑받는 파리는 내게 그저 생활 구역일 뿐이다. 오늘 유일하게 낯선 것은 등에 멘 20kg짜리 배낭밖에 없다


출발하는 이 시점에 여행 경비는 충분치 않으며, 운동 부상으로 왼쪽 발가락을 다쳐 다리를 살짝 절고 있다. 여행의 시작점만 정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루트로 어떻게 갈지는 전혀 찾아보지 않았다. 어느 점으로 봐도, 순례길을 걷기 위한 만반의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다. 따지고 보면 삶이 원래 그렇다.




세상 어떤 삶엔 해일처럼 한 번에 몰려오 위가 있는 반면, 또 어떤 삶에는 고작 물방울 하나에 쌓아온 모든 것들이 스러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후자였다. 경제적 부담으로 잘 다니던 그랑제꼴을 정리하기로 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학교의 석사 과정을 지원했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당연히 붙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다른 결과에 많이 당황하긴 했었지만, 내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고작 한 개가 지워졌을 뿐이었다. 남들에게 하소연해봐야 징징대는 정도의 사소한 사건 하나가 벌어졌을 뿐인데 그 한 방울은 내가 지금까지 고집해오던 신념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처음 프랑스 유학을 결정하고 지금까지 약 6년, 나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준 모든 열정과 철학들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흔한 번 아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 늘 그랬듯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푹 자고 밥도 잘 먹고 운동을 하다 보면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올 거야. 다시 기운을 되찾고 다른 일을 찾아서 집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진취적이던 내가 되어 있겠지. 만약 당신이 간단한 번아웃에 빠져있다면, 거기에서 '어떻게' 탈출하는지는 꽤 간단하다. 평소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되, 수면 주기를 무너뜨리지 말고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날 것. 아침 식사를 거르지 말고, 단백질 위주로 섭취할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호르몬이 안정화되고 신진대사 및 두뇌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두뇌는 부정적인 감정에 덜 취약해지고 하루를 더 생산적으로 사는 시작점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왜'였다. 왜 나는 굳이 번 아웃에서 벗어나야 하지? 지금까지 숱한 실천에도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는데, 왜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아니 그런 모든 노력에도 결국 이런 허무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대체 왜 살아야 하지?


며칠 동안은 먹을 음식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차라리 사람들을 만나 한껏 취하자는 생각으로 밖에 나갔지만, 그날 하필 코로나에 걸려서 다시 격리 생활을 보내야 했다. 친구들의 위로와 격려, 조언에도 나를 아껴주는 그 마음만 고마웠을 뿐 나의 '왜'는 채워지지 않았다. 인생의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그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감내해야 할 아픔이고, 천천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괜찮아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찾아온 질문을 미루는 것이고, 잊은 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다 보면 어느날 다시 내 목을 조여올 것이다. 하루 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다른 지방까지 갔다가 파리로 돌아온 적도 있다. 그 순간만큼은 망가진 다리의 욱신거림 덕분에 저 골치 아픈 질문을 잊을 수 있었다. 매일 밤 만취할 때까지 혼자서 계속 술을 들이켜면서 몇 주를 보내보기도 했다. 나에게 더 너그러워질 수는 있었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자문하면서 잠을 깼다. 질문은 날 떠나지 않았다.




12시 11분 기차를 타고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 바욘 Bayonne으로 다. 4시간 동안 타야 하는 기차 안에는 파리 여행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가족이 보인다. 여섯 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안나의 코스튬을 입고 있다. 종종 아버지에게 장난을 치면서 떠들다가 이내 지쳤는지 좌석에 누워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바욘에 도착한 뒤 기차의 최종 목적지인 생장피에드포르 Saint-Jean-Pied-de-Port로 가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서 환승을 해야 한다. 남은 시간 동안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역 밖으로 걸어 나간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짐의 무게가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천천히 걸으면 된다. 평소 걸음걸이가 빨랐던 나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춘다. 한 호흡에 한 걸음, 더 좁은 보폭으로.





그렇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게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 나의 영혼이나 열정일 수도, 삶의 의미나 목표, 살아야 하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런 단어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잃어버린 '그것'이 잠시 내 곁을 떠난 건지, 아얘 죽어버린 건지 몰라서 속으로 그리워하고 동시에 애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목표를 향해 반짝이던 눈은 어느새 죽어버려 씁쓸한 표정만이 남았고 다른 사람들을 열렬히 응원하던 나의 목소리는 부어버린 목 아래로 삼켜져 응어리로 남았다. 여전히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즐기는 행세를 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체념하고, 꿈을 꾸는 다른 아이들에게 꿈을 쫒는건 잘못된 길이라고 막으면 될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부정적이고 편협한 존재가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상처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상황이 오기 전에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던가, 내가 잃어버린 '그것' 되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40여 일간 주야장천 걸으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이 대체 뭔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 내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 의미도 아니고, 자기 계발이나 여행은 더욱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 위한 방황일 수도 있고, 그 끝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죽어버릴 나를 위한 추모일 수도 있다. 순례길에 오르는 나에게, 가족과 친구들은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순례길이 위험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 고행의 끝에 죽음까지 생각했다. 이전에 적어두었던 유서는 책상 서랍 왼쪽 세 번째 칸에 두었으며, 짊어진 배낭 안쪽에 새로 한 장 작성해두었다. 내가 잃어버린 게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결의 없이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삶이 원래 그렇다.


2022년 6월 29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