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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03. 2022

02. 인간적인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Roncesvalles에서 Zubiri까지 22km, 아침 기온 11도.

이어서 Larrasoaña, Zuriain, Izort를 통과하여 추가로 12km.


새벽 4시 30분, 자리에서 일어난다. 숙소는 대형 수도원을 개조한 곳으로 거대한 홀에서 칸막이로 나뉜 이층 침대가 수없이 나열되어 있다. 아직 자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하게 세면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바로 숙소를 빠져 나온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순례는 모두가 자는 시간에 시작한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를 여행자가 아닌 고행 중인 승려처럼 여기나 보다. 도로를 지나 숲길로 들어가니 금세 빛이 사라지고 어두 껌껌해진다. 헤드 랜턴을 켤까 생각하다가 그냥 을 받아들이고 조심조심 걸어보기로 한다. 천천히 눈이 적응할 시간을 주면, 어렴풋이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기가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밟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청각과 촉각이 진동을 한다. 내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땅바닥의 촉감과, 잔디를 밟았을 때 나는 부스럭 소리. 자갈을 밟으면, 마치 그 차가움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진다. 즘의 우리 너무 시각의존한 나머지, 다른 감각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떤 향이 나잊은 채로 사는지도 모르겠다.




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 있다.


"저 사람, 되게 무심하다가도 종종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정에 끌리지 않고, 이치를 논할 수 있는 것.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우리는 그래 봐야 인간이야. 약하고, 볼품없고, 그저 초라한 존재."

"우리 인류는요, 지금까지 무한한 상상으로 무한한 업적들을 이뤄왔어요."

"시국이 이렇다는 건 이해하지만, 어디 못 가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어."

"이 시국에 사람들이 저만큼 모였다고? 인간이길 포기했나?"

"나도 사람이야. 삶이 힘들어서 술 좀 마신다는데, 이해해 주면 안 되냐?"

"되는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게 인간다운 삶 아니겠어?"

"인간은 서로 보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거야."

"인간의 모든 이타성의 근간에는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거짓을 일삼지 말고, 정직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사세요."

"나도 사람이라,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더라."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치하고 덜떨어진 행동이야."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니야? 공감은 해줄 수 있잖아."

"이 정도는 그냥 눈 감아줘라. 나도 사람이야."

"사람이면 자기 잘못에 반성도 하고, 책임도 지고 그래야지."

"인류의 꽃 피는 지성은 결국 전쟁의 잔혹함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수재민 원조를 위한 목표 금액이 한 시간 만에 달성되었습니다."

"사람만큼 살기를,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동물이 또 있을까."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위를 한다."

"공부를 잘하기 전에 인간이 돼야지."

"이 정도 문제도 못 푸는 거야? 너 사람 맞아?"


대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걸까?





어제가 순례의 첫날이었기 때문에, 다리 여기저기가 욱신거린다.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짐과 늘어난 걸음 수에 무릎이 많이 놀랐나 보다. 다행히 어제 잠들기 전에 스트레칭을 해서 근육통은 심하지 않다. 출발하기 전부터 아팠던 왼쪽 발가락은 생각보다 괜찮다. 회복되었다기보단, 다른 곳이 너무 욱신거려서 비교적 신경이 덜 쓰인다. 이런 걸 극약처방이라고 하던가? 해가 땅을 덥히기 시작할 때, 순례자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마을을 지나친다. 졸고 있던 강아지는 낯선 순례자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무신경하게 다시 드러눕는다. 다음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생각으로 일찍 출발한 건데, 주변 경치를 보면서 걸어가는 지금 속도로는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따라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일등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걷는 동안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발걸음을 재촉해볼까 고민하다 그만둔다. 대신 나는 이 시간을 더 짙게 보내고 있지 않은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나의 순례에 집중한다. 오늘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중간에 도착하는 마을 Zubiri 에는 오전 11시 쯤에 도착할 예정이다. 거기서 잠시 쉬면서 일을 마치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걸어보도록 하자.




인간성이 포괄하는 개념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본다.


긍정적 가치 : 배려, 관용, 이해, 이타심, 변화, 발전, 노력, 약간의 빈틈(실수) 등

부정적 가치 : 변명, 핑계, 편협함, 거짓말과 위선, 이기심, 질투 등


두 가치가 가진 공통점은,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이성적 철두철미함'에서 벗어난 행동을  때 사용된다는 것이다. 기계나 사회 제도 등 생명이 없는 것과 비교했을 때 사람은 더 감정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불완전함 일컫는 표현으로 보인다. 너무 차갑거나 철두철미하지 않고, 어느 정도 느슨함이 있으며 을 좋은 방향으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반대로 남들에게 자신의 느슨함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때, 본인도 사람이라고 변명한다. 이해가 되면서도 굉장히 웃기다. 산업화 문명으로 넘어온 건 아직 200년도 안되었는데, 그 사이에 기계랑 사람을 비교하면서 인간성을 논하다니. 기계 문명 이전만 해도,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동물과 비교할 때 사용되지 않았을까? 더 체계적이고, 이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오! 코를 파묻고 음식을 탐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숟가락을 이용하다니, 당신 굉장히 인간적이군요!'


인간이 가진 고유한 가치는 감정인가 혹은 이성인가? 누군가는 인간이 가진 감정의 풍부함을 강조할 수 있지만, 다른 동물도 그들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은 언어를 통해 감정을 세분화시켜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는 생각을 통해 발화되는 이성의 영역이고, (왜냐하면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다감각적 심상들을 언어라는 코드로 변환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이야말로 인간의 핵심 가치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은 굉장히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Zubiri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하루는 숙소에서, 하루는 텐트에서 지내고 싶다. 텐트와 침낭, 매트리스를 챙기면서 짐이 이렇게 무거워졌는데 숙박비가 싸다는 이유로 야영 장비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순례자 숙소는 대부분 공용 공간이라 아직까진 물건이 도난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밤에는 코골이 소리 때문에 편히 잠도 못 잔다. 전 세계 어디든 공용 숙소를 사용하면 그중에는 꼭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이 있다. 이것과 관련된 과학 논문은 없을까? 야영할 생각을 굳혔기에 굳이 숙소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다리는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떼쓰고 있지만, 아직 더 생각할게 많은 나는 통증에 눈을 찌푸리면서라도 더 걸어야겠다. 마침 더 아래쪽에서 나를 기다리는 캠핑 메이트가 있기에 그에게 합류하기로 한다. 내일은 근처 대도시에서 묵을 예정이다. 오늘 오래 걷는 만큼 내일은 더 많이 쉴 수 있으니 조금 무리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순례자는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간다.




인간성에 대해 이렇게 접근해볼 수도 있다. 영화나 게임, 소설처럼 가상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에선 50년, 100년 뒤를 최첨단 기술로 뒤덮인 화려한 세상으로 묘사한다. 무인 자동차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사람과 똑같이 생긴 AI 로봇들과 같이 일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 안에 주거 및 근린 시설 혹은 유흥업소가 다 합쳐져 있어서 훨씬 더 안락하고 소위 더 힙한, 세련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굉장히 쿨하면서도 퇴폐적인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누군가 당신에게 거기서 살고 싶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내 대답은 No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덜 인간적'이다. 그런 미래 사회는 인간적이라는 가치의 숭고함에서 어딘가 멀어져 보인다. 우리는 조금 더 수수하게, 연인과 카톡도 주고받고, 기념일을 놓치지 않으려고 달력에 표시해두지 않나. 좋은 추억을 만들면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서 좋아요도 누르고, 안부도 묻지 않나. 하지만 핸드폰이 없던 세상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이런 행동은 앞서 상상했던 미래 세계의 퇴폐함에 더 가깝게 보이지 않을까?


인류가 유인원에서 많이 분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지금의 원숭이들처럼 서로 털을 골라주는 게 (그리고 고른 털을 맛있게 먹는 게) 더 인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유럽에서는 요청하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는 게 더 인간적인 일이고, 동아시아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요청하지 않아도 눈치껏 도와주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게 더 인간적이다. 무엇이 더 인간성을 대표하는지는 결국 문명의 수준마다, 문화마다 다를 것이고 더 자세하게 파고들면 각 개인마다 추구하는 인간적임의 정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유의미해 보이는 요인 중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 나면 유년 시절에 경험했던 세상이 모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그때의 삶이 더 인간적이었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유년 시절은 대부분의 경우 생존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는 시기여서, 생명체로 살아간다는 것의 처참한 현실을 모를 시기이고 동시에 성인만큼 자의식이 강하게 발달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다 닳아버린 무릎 연골과 발목 인대를 억지로 질질 끌면서 겨우 캠핑 메이트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벨기에사람인데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써서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더 멀리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해서 오래 걷는 것에 익숙하다고 한다. 같이 한 시간을 넘게 더 걸어서 텐트를 펼치기 좋은 장소를 찾았다. 이대로 해가 져서 별들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요즘의 서유럽은 열 시가 넘어도 별이 보일만큼 어둡지가 않다.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도 이미 열 시간을 넘게 걸어온 나는 빨리 글을 마무리하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하루 동안 인간성에 대한 사색 끝에 토한 결론은, 우리는 참 모순 덩어리라는 것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순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른 동물들은 이런 모순성이 없는가? 어니스트 베커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아기의 출산은 인체에서 가장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방광과 항문 사이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포유동물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출산이라는 생체 시스템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잠재성을 (혹은 그것이 있다는 믿음을) 부여하는 사람 자체가 원인일 것이다. 사람은 왜 람의 삶에 종의 숭고함을 부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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