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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03. 2022

03. 영혼의 문제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Zabaldika 인근 야영지부터 Pamplona까지 약 9km.

Pamplona부터 Zubiri까지 자전거로 왕복 40km.


뒤척이는 소리에 잠을 깼을 땐 6시가 막 지난 참이었다. 나와 같이 야영을 한 벨기에 친구, 레오는 이미 텐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닳아버린 인대를 치유하는데 집중할 생각이라 굳이 무리하고 싶지 않다. 이틀간 무릎을 혹사시키니까 체력이 멀쩡해도 조금만 긴장이 풀리면 휘청인다. 레오는 오늘 도시를 통과해 그다음 목적지까지 더 걸을 생각이다. 여전히 30km가 넘는 여정이라 나에게 빨리 가자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시까지 도착하는 데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시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앉아서 같이 아침을 먹는다. 아침이라 봐야 바게트 빵을 나눠먹는 정도다. 나는 이 도시의 순례자 숙소에서 머무를 예정이기에, 현금을 조금 뽑아야 한다. 그리고 내 지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영혼은 정말로 존재할까?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축할 순 없지만, 영혼에 관한 문제는 다소 복잡해 보인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모든 영혼은 무색일까? 인종마다 다른 색깔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걸까?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은 이미 정해져 있거나, 점차 변색되어 갈까? 정말로 모든 물리적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나? 여전히 자의식이 남아있을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생전의 언어 그대로인가? 영혼들만이 쓸 수 있는 공통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한옥은 어떻게 설명하지? '영혼어'로 떡볶이는 어떻게 발음하지? 마치 아빠에게 끊임없이 왜요?라고 묻는 6살짜리 아이처럼, 영혼에 대한 문제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골치 아파진다. 그러면 굳이 골치 아픈 짓을 왜 하냐고? 그러려고 순례길에 왔으니까!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면, 동물에게도 영혼이 존재할 것이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물고기에게도 영혼이 있을 것이고, (물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새우에게도, 새우가 잡아먹는 플랑크톤에게도 영혼이 있을 것이다. 단세포 생물도 살아있는 존재니까 영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 하나의 영혼만' 존재하는 걸까? 사람의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단세포도 영혼이 있지 않나? 거기에 인체 안에 공존하는 약 120~500조 개의 미생물이 존재하는데 그들도 각자 영혼이 있지 않을까? 인체 하나에 한 개의 영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복합 유기체여서? 위의 내용으로 봐서 '한 개'의 복합 유기체라고 말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고 살아간다. 영혼의 유무를 결정짓기 위함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영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 - Lulu Miller




Catedral de Santa Maria, Pamplona

나는 돌발 상황에 대해 꽤나 의연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낙천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패닉에 빠지지 않고 해결책을 찾는데 재빨리 주의를 돌리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현금은 5유로가 전부였다. 조금이라도 현금 잔고에 숨통을 트여놓는 게 상황을 더 유연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급하게 레오에게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고, 레오는 흔쾌히 현금을 건네주었다. 길을 거꾸로 돌아가야 하지만 배낭을 메고는 한 시간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막 8시 30분이 넘어간 참이었고, 순례자 숙소는 오후 한 시는 되어야 연다. 그래도 어딘가 찾아가서 배낭만 맡아달라고 부탁해보자. 레오는 다음 목적지까지 하루 종일 걸어야 하기에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양쪽 다리를 골고루 절면서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순례자 숙소를 찾아갔고, 다행히 가방을 맡길 수 있었다. 편하게 쉬려고 애써 만든 하루가 완전히 망가졌다. 나는 힘들게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조금 어설퍼보인다. 차라리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러 감정 세포들의 상호 작용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한다는 상상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하나의 개체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게 인간이 지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적당한 인식 범위여서 그런 것 같다. 마치 우리들이 맨눈으로는 세포를 보지 못하고, 세포들은 원자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소개팅 자리에 나갔는데, 상대방이 세포의 개수만큼 영혼을, 그만큼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어떤 말을 해야 상대방이 (37조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의회가) 좋아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상대성 이론이 작동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의식하고 일분일초를 보내는 건 일상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성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혼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 한 개의 영혼을 가진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몸은 수없이 많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의회 거나, 아얘 영혼이 아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더 설득력 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한다. 심지어는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인 심장의 형태로 상징화를 한다. 뭔가 마음을 이끄는 강한 충동이 들면 (이를테면 사랑) 심장이 강하게 두근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별 후에 느끼는 심장의 아픔은 착각이 아니고 진짜 고통이다. 하지만 심장에는 고등 정보를 주고받는 시냅스가 존재하지 않고, 심장의 두근거림은 중추 신경이 통제한다. 당신의 영혼이 두뇌라는 옥좌에 앉아 '멈춰라!'라고 명령해도, 심장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따라서 정말로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 위치는 아무래도 심장보단 두뇌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변덕이 심해도 괜찮다. (심장은 변덕이 심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영혼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마음과 영혼은 별개의 존재가 맞나?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갑을 꺼냈던 곳은 지금 도착한 도시로부터 20km 떨어진 Zubiri 마을이었다. 마을 안에서 잃어버렸거나, 마을과 여기 사이 순례길에서 떨어뜨렸을 것이다. 레오와 합류한 뒤로는 지갑을 꺼낸 적이 없으니,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야영지까지 9km는 의미 없이 걷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마을로 되돌아가야 하나? 만약 순례길 한복판에 떨어뜨렸는데, 다른 순례자가 걸어 내려오면서 지갑을 주웠다면 지갑에 든 내 신분증을 보고 나에게 건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버스를 타고 Zubiri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면서 찾는 건 의미가 없다. 혹시 몰라서 결제를 했던 가게에 전화를 해봤지만, 가게 주인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이 악물고 걸어보자.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다.


이 결의는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말 그대로,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등 뒤가 이렇게나 가벼운데 다리는 더 이상 움직여주지 않는다. 내 영혼은 네가 제발 움직였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근처 벤치에 주저앉아 울었다. 방법이 없다. 말은 안 통하고, 버스는 오후 네 시가 될 때까지 없다. 두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레오가 빌려준 20유로는 숙박 및 식품을 위한 돈이라 택시를 탈 수도 없다. 택시를 탔는데 지갑을 못 찾으면 순례가 그대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좌에 돈은 남았으니까, 숙소 주인에게 부탁해서 현금을 받고 계좌 이체를 할까?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다. 내가 쓰는 은행은 월요일까지 이체가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외통수였다. 순례길을 위한 카드도 중요하지만, 내 프랑스 체류증은 어쩌나? 돌아가서 재발급 신청을 해도, 체류 사유를 증명할 게 없는데? 나에게 순례의 중단은 죽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돌아가면 나는 질문의 답을 찾지도 못하고, 프랑스 생활도 정리해야 하고, 그렇게 등진 순례길을 다시 찾지도 않으리라. 차라리 여기서 죽자. 신이 나에게 그만 정리하라고 보채는 건가 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죽을 생각으로 왔는데, 진짜 못됐다.




우리가 고전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영혼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 영혼은 어떤 모양에 어떤 색깔일까? 여기저기 상처가 있을까? 생각보다 멀쩡하지 않을까? 영혼이 있다면 사후 세계도 존재할 테니, 가서 신에게 따져야겠다. 왜 이렇게 내가 뭘 할 때마다 괴롭혔냐고. 내 행동이 무례해서 지옥에 보낸다고 해도 괜찮으니, 멱살이라도 한번 잡아야겠다. 당신 멱살 한 번 잡아보려고 몇 개월 동안 주짓수를 배웠다. 내 영혼이 여기저기 다쳐서 펑펑 울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깐, 저 표현대로면 내 영혼은 내가 돌보는 존재인가? 그러면 돌보는 주체는 또 누구지? 대체 우리들은 영혼을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걸까?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나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쪽이다. 아직 과학적으로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으니,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건 자유, 없다고 믿는 것도 자유. 엊그제 수도원에 도착해서 내 정보를 기입할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 체크하는 칸이 있었다. 거기에는 종교적 이유, 영적 성숙, 여행 등 선택지가 있었지만 나는 기타라고 답했다.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영성이라니 참 웃긴 말이다. 어쨌든 이 글은 영혼의 유무를 결정지으려는 게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영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영혼이라는 개념은 이전에 다뤘던, 인간에게 숭고함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모든 생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게 왜 인간의 숭고함에 속하냐 반문할 수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인정하고 공통 합의를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인식하는 존재', 어찌 신비하지 않을 수 있는가?




Pamplona에 위치한 순례자 숙소(albergue) Casa Paderborn

잠은 과부하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공원 벤치에 누워서 십여 분을 잤다. 이 다리로 다시 마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쉬자. 순례자 숙소가 열리면 숙소 주인에게 내가 전화를 걸었던 가게 주인과 통화를 부탁하고, 이 도시에 있는 큰 순례자 숙소에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주운 순례자가 있는지 물어보는 글을 붙이러 가자. 그래도 찾지 못하면, 지갑에 남은 25유로로 남은 순례를 마저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고, 그렇게 말라죽으면 그게 내 삶과 순례의 종점이라고 받아들이자. 잠들기 전 통화한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계속 하느님과 싸워보라고 말했다. 좋다. 내일은 다음 행선지로 속행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주인공, 산티아고의 심정이 이랬을까. 괜스레 내 상황에 서사성을 부여해보기도 한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해서 숙박료를 지불한 뒤,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인은 흔쾌히 가게에 전화를 걸어 주었고, 내 지갑을 마을 경찰서에 맡겼다는 답을 들었다. 천운이었다. 통화를 마친 주인 분들도 정말 행운이라고 하면서 같이 기뻐해 주었다. 이제 지갑을 찾으러 가기면 하면 된다. 경찰서가 닫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숙소 주인에게 부탁해서 자전거를 빌렸다. 그나마 자전거라면 평소에 자주 타기 때문에 (하루에 8시간 넘게 타서 지방까지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아무리 다리 상태가 안 좋아도 차라리 나을 것이다. 물론 신에게 감사하진 않았다. 여전히 당신은 못됐다. 오늘 편하게 쉬려는 내 계획을 이렇게 망쳐놓고, 잃어버린 지갑을 찾았으니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더 토라지기로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오늘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무리한 내 다리가 내일 완전히 작동을 멈추면 그게 더 최악 아닌가?


2022년 07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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