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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03. 2022

제주일기 03 난 나의 발목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1-1코스 (우도)

오늘은 다시 혼자서 걷는 날이다. 오후에 흑돼지 오마카세 1인 예약을 해둔 상태라 마음이 급했다. 체크아웃하고 우도를 한 바퀴 걸은 뒤에 흑돼지 먹고 서귀포 시내의 숙소로 넘어오는 일정이라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아침에 마음 편히 일찍 나오면 되는 것을 꼭 밍기적 거려서 촉박한 시간에 등 떠밀리듯 서두르게 된다. 오늘도 8시에 일어나 놓고 30분 정도 따뜻한 침대 속에 파묻혀있느라 늦었다. 거기에 체크아웃하는 곳에 아무도 안 계셔서 한 20분을 기다렸다. 원래 타려던 배 시간은 9시 30분이었는데 내가 조금 서둘러 나왔다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이미 9시 30분 배는 떠나버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라운지에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카카오톡으로 체크아웃과 배낭 보관을 부탁하는 메시지를 남겨두고 성산포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직원분께서 오케이 해주셔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어제 2코스를 걸으며 발가락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더니 결국에는 물집이 왕창 잡혔다. 발가락은 열개뿐인데 그중 절반인 다섯 개의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서 모두 터뜨리고 터뜨린 물집이 아프지 않도록 등산화 대신 쪼리를 신고 나왔다.(이때는 알지 못했지만 3일 차에 남은 열흘의 일정을 크게 바꿔놓은 선택이었다...) 숙소에서 성산포항으로 가는 길에 흙길이 있는 건 미처 생각을 못해서 발이 조금씩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런 건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항구로 향했다. 10시 티켓 사고 화장실 들르고 하면 약간 빠듯할 것 같아서 서둘렀는데 다행히 시간이 맞았다. 천진항으로 들어가는 것이 베스트였지만 내가 간 시간엔 하우목동항으로 가는 배편이었다. 생각보다 본섬과 거리가 가까워 10여분 정도 배를 타면 우도에 도착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우도를 보며 '오늘은 11km 정도를 걸어야 하고 다시 하우목동항에서 배를 타고 나가려면 4시간 반 안에 걷고 3시에 돌아오는 배를 타야겠다!'는 내 기준 나름의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며 전의를 불태웠다.


섬에서 섬으로 훌쩍 뛰어갑니다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하우목동항에 도착해 나오니 소를 닮았다는 우도에 놓인 소 동상이 여행객들을 반겼다. 스탬프 간세에서 출발 도장과 도착 도장을 모두 찍은 후 정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4년 만에 방문하는 방문하는 우도에는 호밀인지 청보리인지 모를 푸른 식물들이 바다처럼 펼쳐져있었다. 이번 여행 일정에 가파도 청보리밭을 보러 가는 일정이 있었는데 마치 우도에서 예고편을 본 것 같았다. 푸른 식물들이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생겨나는 결은 정말 부드러워 보여서 한 번 쓰다듬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우도를 걸을 땐 유독 마을을 지나는 길이 많았는데(생각해보니 그냥 올레길은 그 지역의 마을길을 걷는 코스가 꼭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그때마다 집의 모양과 돌담을 보면서 나중에 이런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붕 색이 왜 이렇게 다들 예쁜지 초록, 파랑, 주황, 흰색 지붕들을 보면서 색 한 번 참 잘 뽑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왔다. 거기에 푸른 들판과 유채꽃밭 그리고 현무암까지 색색으로 물들어있어서 별세계에 와있는 것 같았다.


유난히 알록달록했던 우도의 마을

동네 길을 따라 걸으며 평탄한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돌담 사이에 난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여기는 바닥이 흙밭인 데다가 골목길 전체가 유채꽃으로 뒤덮여있어서 풀숲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은 더러워졌다. 이렇게 풀숲을 해치고 걸어본 건 시골에 자주 가는 나도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길도 안 보이는 데 여길 가야 하냐며 차라리 돌아가는 길을 찾자고 했을 텐데 거의 맨발과 다름없는 상태로 이런 길을 걸었다니. 여행지에서는 평소에 안 하는 것도 도전해보는 용기가 생긴다. 정말 신기한 건 흙이 검붉은 색이라서 발과 검은색 쪼리가 점점 갈색으로 변한다는 점이었다. 발에 닿는 흙이 부드러워서 더러워지는 것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좁은 길을 벗어나 걷다 보니 어느새 하고수동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바로 중간 스탬프가 있는 곳! 해수욕장 앞이라 그런지 식당이나 카페도 많아서 잠시 앉아서 땅콩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 했지만 갈 길이 구만리라 차마 쉬지 못했다. 여유롭게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아침에 30분 늦게 일어난 대가로 우도에서의 여유가 줄어버렸다. 본섬이 보이지 않아 탁 트인 에메랄드 빛 바다와 흰모래사장이 정말 이국적이라 여름에 놀러 오면 정말 좋겠단 생각만 하며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사실 발에 물집 때문에 담가볼 수도 없었지만.


유채꽃밭에 길 있어요..!!! 길입니다..! 아무튼 길!!!


그리고 이제 대망의 우도봉 코스! 제주올레 홈페이지를 보니 우도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공복에 산을 탔다. 이미 배고픈 상태로 오랜 시간 걸었는데 거기에 계단 길까지 오르니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내려오는 분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게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거리 같아 보였다. 걷기 3일 차라 그런지 다리가 천근만근이라 계단 한 칸 올라갈 때마다 남의 다리 끌고 가는 느낌이었는데 다행히도 숨 넘어가기 직전에 계단이 끝이 났다.


항상 이런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도대체 이런 게 뭐가 좋다고 힘들게 올라가나, 다시 내려올 거면 뭐하러 올라가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그럼에도 고생해서 끝까지 올라간 끝에 마주한 풍광 때문에 자꾸만 오르게 된다. 우도 3회 차 방문자인데 한 번도 우도봉 꼭대기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우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보는 우도의 전경은 정말 끝내줬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먼바다까지 푸르게 한눈에 담으니 정말 눈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분지처럼 보이는 움푹한 곳에 풀어놓은 말들도 구경하고, 저 멀리 보이는 제주 본섬도 구경할 수 있었다.


쪼리를 신은 채로 너무 퍽퍽 걸은 탓인지 등대를 지나 내려오는 길부터 자꾸만 발목 부근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나올 때 까진 괜찮았는데 천진항에 도착해 부모님께 통화를 하고 난 이후에 발을 디딜 때마다 누가 때리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래도 하우목동항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계속 걸었다. 하우목동항 가기 전에 땅콩 아이스크림 먹는 게 목표였는데 홍조단괴해빈을 지날 즘 정말 발이 너무 아파서 의자에 앉아 강제로 쉬었다. 여기서 항구까지는 30분이 안 걸리는 거리고 도착한 시간은 1시. 배 타는 시간까지 무려 2시간이나 남은 상황이라 어차피 쉬었다가 천천히 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본섬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보냈다. 왜 굳이 사서 고생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혼자 있는데 아프니까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어 더 아프고 서러웠다. 그래도 앉아서 쉬다 보니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길 끝에 뭔가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 걷는 순간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아서 이렇게 맑은 감정과 정신이 얼마만인지 모를 정도로 상쾌했던 지난 이틀이 스쳐 지나가서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 이유를 들어보자면 걸으며 만난 길 위에서는 차를 타고 여행하느라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있고 또 그런 일들로부터 내 고민의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단 생각 때문이었다. 낯을 극도로 가리고 사람 사귀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2일 차에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 중 하나였다. 이렇게 길을 걸으면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도 알게 되는 좋은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수 있을까? 아프다고 3일 만에 포기하기엔 제주의 돌아보지 못한 봄이, 그리고 미쳐 다 돌보지 못한 나의 마음이 아까웠다.


하우목동항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우도까지 왔는데 서빈백사 모래는 밟아봐야 할 것 같았다. 4월인데도 겨울처럼 찬 바람이 불어대는 바닷가였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마주한 투명하고 작은 파도들이 너무 예뻐서 발 아픈 것도 잊게 만들었다. 흰색 모래 같지만 모래도 아닌 것을 밟고 서서 가만히 파도소리를 들었다. 아픔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다행히 하우목동항 가기 전에 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어서 아이스크림과 땅콩 라떼를 주문했다. 찬 바람에 얼었던 몸을 녹이고 (4월인데 얼어 죽을뻔하다니, 얼마나 추웠으면 다시 돌아올 때 배 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쉬면서 발을 주물러줬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하우목동항에 도착했다. 2시 30분에 도착해 미리 배를 타고 성산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뜨끈한 선실에서 피로를 풀었다.


발목이 아파도 고기는 포기 못한다. 다리에 무리가 더 가지 않게 아주 천천히 걸어 예약해둔 식당에 갔다. 사장님께서 직접 구워주셔서 너무 맛있는 식사가 됐다. 갈매기살은 담백하고 꽃살은 부드럽고 꼬들살은 오독하며 목살은 육즙이 장난 아니었다. 거기에 후식으로 고추장찌개까지 주문했는데 물을 하도 마신 바람에 다 먹진 못한 게 아쉽다.


보름치 짐이 담긴 묵직한 가방을 메고 새로운 숙소가 있는 서귀포시로 향했다. 원래 몸보다 중량이 더 나가니 발목은 더더욱 아파.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대가로 발목 부상을 얻어버렸다. 여행 와서는 내 몸을 더 잘 돌봐야 하는데 내가 내 발목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고기를 소중히 여긴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전 시간의 소중함을 모른 대가인 것 같기도 하다. 과연 나는 계획대로 남은 코스를 다 돌아볼 수 있을까..?


발목은 아프지만 행복했던 우도 올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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