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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28. 2022

제주일기 12 잘해도 못해도 아쉬운 마지막 날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8코스

월평에서 대평까지


아침에 일어나 다리가 아프면 걷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올레길 지도를 체크해보니 8 코스만 걸으면 엊그제 걸은 9코스까지 연결이 된다는 생각에 몸이 저절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긴 걸음을 해야 하기에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했지만 정신머리는 단단한 준비가 되지 않아 물을 챙기지 않는 참사를 저질렀다. (가다가 사면 될거라는 안일한 마음 때문에...)


7코스의 종료지점인 월평 아왜낭목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30분 정도 걸려 도착하니 오늘도 꽤 많은 분들이 8코스를 시작하고 계셨다. 일행으로 보이는 열몇 명의 사람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북적이며 함께 걷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8코스는 월평에서 시작해 지난번 부모님과 함께 걷기 시작했던 대평리까지 이어진다. 올레길 코스 설명을 잘 읽어보면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단 문구가 있는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읽지 않아 나는 평지만 쭉 계속되는 줄 알고 걸어서 중간에 진짜 엄청 고생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귤 하우스에 물을 주고 있는 걸 발견했다. 맨날 건조한 하우스만 보다가 물 주는 소리를 들으니 왠지 바닷소리 같고 좋았다. 마을 길 따라 마을 구경도 하고 유난히 많은 야자수 구경도 하며 걸었더니 어느 순간 길은 나를 약천사로 인도했다. 펜션에서 작은 길을 따라 내려오니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절 건물. 대웅전이 엄청 커서 깜짝 놀랐다. 바다가 보이는 절이라 그런가 낙산사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사찰 내 군데군데 보이는 야자수를 보니 제주인 게 실감이 났다.


야자수가 보이는 절은 처음이라


갈 길이 먼데 너무 구경만 하며 걸었더니 시간은 어느새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서둘러 약천사를 지나 대포포구로 들어섰다. 가는 길에 유기농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파는 카페가 보여 지나치지 못하고 냉큼 들어가 아이스크림 먹은 건 안 비밀. 포구를 바라보며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이 정말 맛있었다.


포구를 나오는 길목에 무인으로 귤을 판매하는 매대가 있었다. 현금을 안 챙겨 와서 아쉽게도 살 수는 없었지만 이번 길 위에서 요런 작은 매대를 많이 만났다. 사람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지만 여기는 귤이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걸 톡톡히 느꼈다. 2코스에서 만난 분께 얻어먹은 귤이 이번 여행의 전부였다니.. 반성해야지.


귤을 사먹지 못한게 크게 아쉬웠던 이번 여행


대포포구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중문 관광단지 쪽으로 간다. 길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야자수를 지나 주상절리 관광안내소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다시 출발. 처음 시작할 때 만났던 단체 여행객분들을 여기서 또 마주쳤는데 혼자 걷고 싶어서 빠르게 걸어 추월했다. 중간 스탬프를 찍고 나니 사실상 8코스 스탬프는 다 찍어버려서 안 걸어도 되나..?! 싶었지만 이번 여행의 의미가 퇴색되는 건 싫어서 열심히 걸었다.


7km 지점부터는 베릿내 오름을 산책하듯 한 바퀴 돌아서 나오는 코스인데 다른 코스들과 다르게 이 오름은 들어오는 곳과 나오는 곳이 같아서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분들도 더러 계신 것 같았다. 그래도 코스에 나온 그대로 최대한 따라가 보는 것이 목표인지라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끝없는 계단을 오르다 힘들어서 뒤를 딱 돌아봤는데 뒤에 바다가 한눈에 다 안 담길정도로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름에 오르기 전에도 바다를 수없이 봤지만 역시 올라와서 보는 바다가 더 멋있는 것 같다.


우리 동네 산인 봉화산의 계단길 느낌 나는 길을 쭉 걸어 올라가면 (소요시간도 봉화산이랑 비슷했다.) 금방 정상이 나온다.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보니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한라산이 보이는 게 이 오름의 포인트인 것 같았다. 7코스 삼매봉에서 한라산과 바다를 봐서 '아니 7코스에 그런 뷰 넣어놨으면 8코스는 빼도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8코스에서 보는 뷰는 또 다른 느낌이 났다. 7코스보다 더 탁 트여있어서 휴양지에 온 기분.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며 잠시 쉬다가 서둘러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둘레길처럼 계단보단 평평한 길이 더 많았고 천제연 산책로를 경유하는 길이라 절벽과 숲길을 한 번에 즐길 수 있었다. 봄이라 그런지 지천에 흰 꽃이 널려있어서 동화 속을 걷는 기분도 들었다.


오름을 내려와 중문 관광단지를 가로질렀다. 오름을 오를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수분 공급이 시급했던 지라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편의점을 찾아 물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중문 색달 해변이 옆에 있길래 해변으로 가는 코스일까 싶었는데 엄청난 계단 오르막길을 만나버려서 근육통이 있던 나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간..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와 스타벅스에서 간식을 챙겨 먹었다. (오늘 저녁 고등어회라 점심에 디저트 종류만 사 먹었네..)


베릿내 오름에서 만난 풍경들


중문을 나와 비록 차도이긴 하지만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시원하고 쾌적한 기분을 느낀 것도 잠시, 예래생태마을의 생태공원으로 가는 길까지 내내 그늘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4월이니 망정이지 한여름에 여길 걸을 생각을 해보니 따가운 햇볕에 중간에 드러눕지 않았을까 싶었다. 생태공원은 그래도 나무도 많고(벚꽃이 많아서 3월에 엄청 예쁠 것 같았다.) 천 따라 물소리도 계속 들려서 덥진 않았다. 중문 관광단지에 비해 사람도 적어서 한적하게 걸을 수 있다는 장점! 대신 바닥에 깔아 둔 돌이 평평하지는 않아서 발목이 슬슬 아파오는 것만 빼고는 정말 좋은 길이었다.


생태공원을 따라 한참 내려오다 보니 어느 순간 바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논짓물이 있는 하예 마을에 도착했다. 논짓물의 풍광이 정말 멋있었다. 담수가 흘러나오는 곳에 물을 가둬 여름엔 물놀이하는 용으로도 쓰는 것 같고 보이는 뷰는 오션뷰! 이것이 천연 인피니티풀 아닐까 싶다. 더워서 손을 담가봤는데 아주 시원한 물이 흘러서 물놀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논짓물


점차 아파오는 발목을 이끌고 하예포구를 지나 3km 정도를 더 걸었다. 언덕 하나,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9코스를 걸으며 봤던 박수기정이나 형제섬, 마라/가파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 날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느낌이라 기쁘다가도 아쉬운 마음이 계속 교차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8코스 종료 지점이 다가올수록 지난 보름 동안 걸었던 길들이 스쳐 지나갔다. 발목 부상 때문에 아쉬웠던 것도, 너무 멋진 경관을 보름 동안 볼 수 있었던 기쁨도 모두 꼼꼼히 다시 들여다봤다. 이제 서울에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올지 생각도 잠깐, 드디어 8코스 종료지점이 보였다. 10시 30분 정도부터 걷기 시작해서 17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도착하다니. 엄청 여유 있게 걷긴 했지만 진짜 오래 걸리긴 했다.


두 번째 방문이라 조금은 익숙해진 대평리 마을길을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버스에서 졸았다. 19.6km는 그 정도로 긴 코스였다. 숙소 근처에서 고등어회를 포장해 들어와 먹었는데, 역시 제주에 오면 고등어 회를 안 먹을 순 없지. 천상의 맛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숙소 정리도 하고 마지막 밤을 지나 보낸다. 내일은 서울에 가는 날, 아쉬운 마음이 진하게 남는 밤이다.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에 또 올게,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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