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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없는 마을에서 노는 법

[양평 사람 최승선 016] 서울에 가는 날에야 그네를 탔다

by 최승선

우리 마을엔 놀이터가 없었다. 이게 특이한 일인 줄은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던 것 같다. 90년대생들이 추억을 회상하는 콘텐츠에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이 늘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서야 알았다. 놀이터는 초등학교에만 있는 것.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서 큰 공원에 가야 있는 것. 서울의 사촌 아파트에 가야 있는 것이었다.


놀이터가 없는 게 특별하지 않았던 건, 놀이터가 없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놀이터가 없어서 땅을 밟으면 안 되는 ‘혹성탈출‘ 같은 건 못 했지만 그건 아주 가끔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다. 그보다 나는 땅따먹기를 좋아했고, 달리기와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일을 좋아했다. 약 100미터 앞에 있는 집의 3살, 6살 차이 나던 동생들과 6학년 때까지 성실하게 놀았다. 놀이터는 없었지만, 우리에겐 마당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는 놀이는 기록 경주였다. 동생들의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커다란 오디나무가 있었는데, 동생들의 집에서 오디나무까지 달리기 경주를 했다. 그런데 우리는 핸드폰이 없었으니까, 입으로 “일! 이! 삼! 사!” 셌던 기억. 셋이 나란히 달리면서 가장 연장자였던 내가 “일! 이! 삼! 사!”하며 달렸던 기억. 기록 단축을 위해 한 명씩 달리고, 한 명은 응원하고, 또 나는 “일! 이! 삼! 사!” 외쳤던 기억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잊히지 않는다.


셋이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땅따먹기였다. 우리는 꼭 “일이삼사오육칠팔 할래?”라고 얘기했다. 13살, 10살, 7살의 놀이이니 언제나 이기는 사람이 뻔했고, 이긴다고 좋은 것도 진다고 안 좋은 것도 없는 게임을 거의 매일 했다. 어린이들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소근육이 덜 발달했는지 모든 땅의 주인이 정해지면 끝날 게임을 2시간 넘게 했다.


커서 만나는 땅따먹기 판마다 반가움에 시도해 보면 한 번의 실수 없이 ’ 천국‘으로 가 땅을 점령해 버리는 탓에 이렇게 지루한 걸 어떻게 매일 했나 생각한다. 미숙한 단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법인가 보다. 달리기도 그렇다. 0.01초까지 기록 가능한 스톱워치가 있었다면 우린 하지 않았을 것이다. 쩌렁쩌렁하게 마을을 울리게 “일! 이! 삼! 사!” 외치는 게 웃겨서 계속 뛰기도 했으니까.


얼마 없는 놀이터에서, 특별히 없었던 건 그네였다. 그네는 초등학교 놀이터에도, 시내의 공원 놀이터에도 없었고, 오직 서울의 사촌 아파트 놀이터에만 있었다. 양평에서 만난 그네는 우리 집 마당의 그네, 앞집 동생들의 마당의 그네였다. 아빠가 어느 날 차고에 파란 끈의 완구용 그네를 달아주었다.


몇 년이 흘러 끈은 삭아 끊어졌고, 아빠는 사 오는 대신 희고 두꺼운 공업용 밧줄과 땔감 더미 중 가장 매끈한 합판을 연결해 그네를 만들어줬다. 얼마 안 가 기울어진 그네는 서서 타야만 했고, 한쪽으로 무게를 실어 직접 균형을 맞춰야만 했는데 당시의 어린이는 능숙함을 뽐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들에게 자립심과 자율성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들이 주목받고 있다. 자연환경에서 뛰어노는 유치원이나 무해한 놀이터. 우리에겐 마당이 그랬다. 좁은 놀이터에서 10명이 뛰어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빽빽하게 주차하면 차 7대는 댈 수 있는 마당에서 3명이 노는 건 편안했다.


눈이 오면 수돗가에 눈을 퍼다 날라 우리만의 스키장을 만들었다. 어린이 창의 프로그램에서 신문지로 집 짓는 방송을 보고 남는 땅 한 귀퉁이를 100원 주고 사서 집 짓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닦아놓은 터에 누군가 똥(비유가 아닌 실제 ‘변’을 말한다.)을 싸놓고 가는 바람에 땅을 포기했지만.


흔한 시골 아이들처럼 풀 자란 여름이면 각자 나무 막대기를 목검으로 지참하여 풀을 베러 다니기도 했다. 바람을 가르던 나만의 목검의 소리와 약 30번의 검술을 선보인 후 귀가하던 뿌듯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모두가 각자의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데, 나의 추억의 풍경은 오직 네 사람만 간직하고 있다는 게 좋다. (글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나의 남동생도 끼곤 했다.)


그 생각 때문에 우리 집이, 우리 앞집이 언젠가 응답하라 1994의 결말처럼 허물어지는 날이 온다고 상상하면 아무 일 없는 날에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고향 잃은 어른들은 어떻게 그 쓸쓸한 억울함을 견디고 사는지, 나는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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