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41] 수업 끝나고 나오면 펼쳐지는 절경, 장관.
중학교 영어 선생님은 백지를 주고 본문을 쓰게 하는 백지시험을 냈다. 아마도 그 시험을 보고 있던 때였던 것 같다. 선생님은 웃으며 '너네 공부 안 하면 저기 A대 가는 거야'라고 자극을 줬다. 갑자기 나타난 'A대'에 어리둥절하며 친구들과 눈빛 교환을 했다. 농담에 설명이 필요해진 것이다. 선생님은 A대의 풀네임을 알려줬고, 그제야 농담을 이해한 중학생들은 이후로도 열심히 써먹었다. "야, 너 공부 안 하면 A대 간다 ㅋㅋㅋ"
그렇게 친구들을 놀리던 나는 A대에 갔다. 입결로 A대를 무시하던 그 선생님이 얼마나 멋이 없었는지 깨달아가며, A대만이 갖고 있는 아이덴티티에 흠뻑 빠져 수시, 정시 합쳐서 쓴 딱 한 장의 원서를 A대에 냈다. 같은 과가 있는 C대도 원서를 썼으나, 붙어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급하게 담임 선생님께 접수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오직 A대만 가고 싶었다.
A대는 그 존재를 알아도 도통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학교였다. 친한 언니가 그 학교를 가고 나서야,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알 수 있었다. 언니는 학교를 몹시 좋아했고, 나는 언니의 학교 이야기가 몹시 흥미로웠다. 꿈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던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던 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A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 학교를 가게 됐는지 설명하자면 일종의 '간증'을 해야 하므로 (생략)
다만 그 학교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해보자면, 야자 시간에 그 대학 관심 있는 과 3개와 개설 교양 커리큘럼을 엑셀로 정리해 뽑아서 8학기 커리큘럼을 정리했다. 학교 홈페이지의 모든 게시물을 외울 기세로 탐독했다. 수만휘(입시 정보 공유 네이버 카페)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해 나오는 글마다 카카오톡 아이디를 뿌리며 단톡에 초대했다. 훗날 그 열정이 너무 부끄러워 일일이 삭제했다.
아무쪼록, 그렇게 입학하게 된 대학교는 너무 행복했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했던가. 모든 수업이 내 흥미를 자아낸다는 것이, 매 학기 존경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모두 행복했다.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내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다 토해서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 학교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만 18살에서 23살쯤 되는 뻬이비들이 더 사랑하지 못해 미숙한 자신의 마음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학교가 있는 양평의 청소년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여름방학과 돈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종교의 힘이었다. 종교의 힘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사랑을 최우선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5년을 지냈다. (휴학을 1년 했지만, 부지런히 학교에 갔다.)
그보다 자랑하고 싶은 건 교수님들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치기 어린 대학생들은 남들을 무시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깊이 있진 않네' 하며 교수님들을 평가하기도 일쑤였다. 교수님들은 휘둘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오랜 세월로 단련된 아량으로 이해해 주고 기다려줬다.
역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학교가 있는 관계로, 아침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 서는 학생들을 몇이라도 태워다 주려고 굳이 아신역을 들렸다 교수님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학연수를 가는 학생들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서 보조배터리 수십 개를 사줬다는 이야기, 학비가 부족해 휴학하는 학생에게 학비를 대줬다는 이야기도 대단히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건 교수님들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주는 이야기다. 교수님들은 주로 양평 어디께의 주택 혹은 타운하우스에 많이 사셨는데, 몇몇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해주셨다. 종종 학년 MT를 교수님 댁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졸업생들이 멀리서 오니까 자고 가라고 게스트룸을 구비해 두신 분도 계셨다. 나는 그런 어른들이 '나의 어른'이 되어준다는 사실이 내내 든든했다.
양평 사람들이 모르는 동안 양평의 산등성이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펼쳐져왔다. 양평 사람들이 모르는 끝내주는 설경이 있는 학교가 있다. 바로 옆에 '구벼울'보다 높은 곳에서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그곳에서 청년들은 성장하고, 사랑하고 있다. 나는 자주 양평 사람들과 우리 대학교가 더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상상해 본다. 전도하겠다는 기고만장한 마음을 버린 사람들과 활용하려는 마음을 버린 사람들이 만나 더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펼칠 날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