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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버스 타기! 한 4시간쯤?

[양평 사람 최승선 042] 남한강 줄기 따라 2000-1 버스 여행

by 최승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 했던가. 대학 생활의 대부분은 주 2일 공강이었으나 돈이 없었다. 공강이 겹치는 친구를 찾기도 어려웠지만, 혹시나 친구가 나타나면 더 어려운 일이 발생하는 셈이었다. 밥 한 끼만 먹어도, 카페 한 번만 가도, 어떤 때는 외출을 위해 버스를 탈 때도 통장 잔고를 계산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 뭐라도 하고 싶을 때 나는 버스를 탔다. 2000-1. 이름부터 비장해 보이는 이 버스는 양평터미널에서 출발해 동서울터미널에서 회차하여 다시 양평터미널로 돌아오는 노선을 따라 달렸다. 대학교 후문에 들리는 몇 안 되는 버스 중 하나였는데, 2014년쯤에는 하루에 6회쯤의 기회가 있었다. 매해 하나씩 사라져 지금은 두 번의 기회만 남았지만.


양평터미널에서 아신대학교 후문까지는 약 15분. 그런데 그 버스의 목적지가 동서울터미널이라는 게 신기했다. 양평에 경의중앙선이 연결되기 전까지는 방학마다 서울을 오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에 갔는데, 거기까지 시내버스로 갈 수 있다니! 동서울터미널에서 양평까지 버스로 약 40분이 걸렸기 때문에 첫 시도는 아주 호기롭고 어리석었다 할 수 있다.


수업이 없던 어느 날, 나는 1교시 수업을 들을 때와 같이 일어나 7시 20분 버스를 타고 양평 터미널로 갔다. 약 20분쯤 시간을 때우면 등장하는 2000-1번. 여느 경기도 버스와 다를 바 없는 민트색 외관이지만 내부는 거의 시외버스였다. 좌석에 앉으면 기사님이 내가 탔는지, 내렸는지 알 수 없게 쏙 가려지는 높은 등받이와 안락한 쿠션은 버스 여행에 제격이었다.


등교 버스를 타고, 남몰래 여행을 시작한다. '다음 정류장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후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후문입니다.'라는 말에 어쩐지 못 들은 척하는 마음으로 창 밖을 바라본다. 그렇게 지나간다. 지금부터 여행이다. 코스는 아신역에서부터 남한강을 따라 두물머리를 지나고, 도농과 구리의 도심을 가로지르고, 다시 강변을 따라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버스에서 나는 잠을 청한다.


휴일에 1교시 수업 패턴으로 나왔으니 몹시 졸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는 운전하면서도 멀미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차에 타면 자야 한다. 그럼에도 그 여행은 몇 번을 더 했을 만큼 좋았는데 그 이유는 '남한강을 따라가는 버스에서'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자다 깨면 남한강이 보인다. 졸다 눈을 뜨면 남한강이 반짝인다. 멀미로 엎드려있다 고개를 들면 남한강이 파랗다. 그 맛이 일품이다.


특히, 버스는 일반 승용차보다 멀미가 심하기 때문에 핸드폰을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름하여 디지털 디톡스 코스! 핸드폰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카메라 어플을 켤 때, 그리고 노래를 넘길 때뿐이다. 그 이상 핸드폰을 했다간 멀미로 하차까지 죽을 맛을 면치 못한다. 핸드폰도 보지 못하고, 같이 대화할 사람도 없는 그 버스에서 입 닫고 4시간을 있다 보면 별의별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그때를 위해 노트는 준비했다. 줄이 없는 노트면 좋다. 종이를 보면서 필기할 순 없고, 감에 의해 적어야 한다. 키워드 중심으로 어떤 때는 과제 아이디어, 어떤 때는 사업 아이디어, 어떤 때는 글감이 쏟아진다. 아빠 차를 타고 꽉 막힌 홍대 도로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생각하고,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찬혁을 경험할 수 있다.


10년이 지나,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금 생각하면 그 '청춘스러움'이 흥미로울 따름이다. 4시간이라니. 도쿄에서 한국으로 와, 상하이로 갈 수 있는 시간인데. 부산을 왕복하고 올 시간인데. 똑같이 버스를 타도 거제도를 갈 시간인데, 서울 구경하고 도로 양평터미널을 그렇게 다녀오다니. 한 번 화장실도 가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창문도 열지 않고,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4시간을 앉아있는 여행이라니.


그 추억을 갖고 있다는 게 여간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는 게 든든하다. 그 추억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든 차에서 한 번 내리지 않고 4시간 동안 드라이브만 하고 와도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 떠나야지. 언제 갑자기 허리 이슈로, 무릎 이슈로, 생각지 못한 어떠한 이슈로 하지 못하게 될 일이다. 올해, 한 번은 2000-1 투어를 다시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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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열렬히 사용하던 시절, 2000-1을 향한 애정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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