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연기할래?
군대를 갓 전역하고 재미를 찾아다니는 한 마리의 굶주린 하이에나에게 걸려온 절친의 전화였다.
그 친구가 나를 데려간 곳은 뮤지컬 동호회였다. 프로 배우들이 모인 극단이 아니라 학생, 직장인, 일반인 등 아마추어 배우들의 모임이었다. 친구의 말은 ‘재미를 찾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다.’였다.
거기서 내가 맡은 역할은 앙상블이었다. 뮤지컬에서 앙상블은 영화와 드라마의 엑스트라 같은 존재였다. 지나가는 행인1과 같은 존재지만 연기에 추임새를 넣고 넘버(뮤지컬에서는 노래를 넘버라고 부른다)에 화음을 넣고 대사 한 줄 없지만 엄연히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대본에 대사 한 줄 없는데 나는 무슨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온전히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예술가의 고뇌를 느꼈다. 배우는 대본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본이 없을 줄이야.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밤하늘에는 길잡이별이라는 북극성이 있듯이 앙상블에게도 주연 배우들이 있었다. 주연 배우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면 되는 것이었다.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연기는 액션도 중요하지만 리액션 또한 액션 못지 않게 중요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자 나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렸다. 주연 배우의 대사에 어떻게 반응할 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대사 한 마디에 깜짝 놀라든, 코웃음 치든, 눈물을 흘리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자유로운 연기라는 것을 느꼈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보다 더 많은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이라는 것은 항상 긴장되는 순간이다. 나의 첫 무대도 긴장이 가득했다. 나는 주연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구석에 있는 앙상블일 뿐이었지만 무대 위에 있는 누구보다도 긴장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무대와 객석이 너무 가까워서 연기를 하는 동안 관객의 반응을 하나하나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대는 너무 밝고 객석은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관객들의 존재가 나를 긴장시키지는 못했다. 일부러 객석을 집중하지 않으면 관객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늘 연습했던 대로 배우의 대사 하나 움직임 하나에도 느끼고 반응하기. 음정과 박자 맞추기. 등장과 퇴장 타이밍 잊지 않기.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자 첫 공연이 끝이 났다.
막이 내린 무대에서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면 마치 지난 두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떠들썩했던 관객의 반응을 곱씹으면서 그때의 짜릿함을 또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첫 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