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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 Oct 07. 2021

모일까 말까 할 땐 모이지 말자?

“모일까 말까 할 땐 모이지 말자”

  동네에 걸린 현수막의 어조는 단호하고 냉정하다. 코로나가 터지고 거리두기라는 냉혹한 말이 일상이 된 지 한참이 됐다. 특히 수도권 4단계 거리두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사람 만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출근이 ‘금지’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이게  노멀normal이라 생각하다가도 문득 사무실에 버글버글 하던 동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의자만 돌리면 마주보고 일이며 일상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 메신저에서 점심 약속을 잡고, 11시 50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빠져나와 식당으로 향하며 나누던 수다들이 말라버린지 너무 오래다. 숨통같았던 그 만남과 수다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새삼 소중함을 느낀다. 

  사실 작년 코로나가 처음 터지고는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처음 겪는 상황에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인사 정도 SNS에서 나눌 수 있었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며 이런저런 방법들을 시도하느라 분주했다.(2020년 나의 키워드는 뜨개질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작년부터 유예해 온 만남들이 또 다시 기약없이 미뤄지다보니 안부를 묻기도 어색해졌다. 만나지도 못하면서 인사를 건네기도 영 뭣 한 기분. 마스크 쓰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속으로 따져보게 된다. 나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메마르고 척박해지다니. 코로나 1년만에  MBTI E 중의 E로 통했던 내가 집콕의 대명사, I중의 I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메말라버린 인간관계 속에서 서서히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도 줄어듦을 느낀다. 만남과 대화, 마주한 얼굴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자극이 사라지고 모든 고민과 생각들이 ‘나’로 향한다. 내 커리어, 내 주말, 나의 안전, 나의 점심. 내 안에서 꽤나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꼈던 시민의 감각이 점점 옅어지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이전에 참여하던 다양한 공익 사이드 프로젝트는 이미 다 접었다. 요새는 영어공부나 뜨개질, 넷플릭스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이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나의 변화된 일상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요새같은 세상에 맘만 먹으면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작년 클럽하우스로 사람들이 몰려간 것처럼 대화가 고픈 이들은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 대화의 도구들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SNS에서 쏟아내는 일방향의 대화는 언제든 스킵 버튼으로 제어할 수 있고, 화상회의는 음소거라는 막강한 기능으로 대화를 차단할 수 있다.(말하고 있는데 음소거 기능을 해 놓고,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사람들. 정말 참을 수 없다) 마스크는 표정으로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를 가려 버린다. 상대방이 정말 내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지, 내 말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다. 코로나 시대 우리의 대화는 무언가 부족한, 그래서 진짜 자극과 깊이있는 사유를 끌어내지 못하는 표면적 대화처럼 느껴진다. ‘찐’ 대화가 부재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는 일이 점차 줄어들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만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사회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존재와 행동이 사회에 쓸모 있기를 바라는 사람.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를 움직이는 작은 티끌 중에 하나라도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물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 생각이다)

하지만 사회의 일부로서 나를 깨닫는 감각이 떨어지면서 과연 사회적으로 내가 쓸모있는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재난지원금이나 축내며 오늘 저녁에는 뭐 먹지? 내일 점심에는 뭐먹지? 어떻게하면 오늘 근무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내지?만을 궁리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 같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말라버리고 재미없고 건조해진다.  


이쯤에서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들 사이 물리적 거리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동기를 떨어지게 할까?

 가설을 세워보자면 몰려 살면 얼굴을 자주 미주치고 대화할 기회가 늘어난다.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기회가 될테고, 그 기회는 다시 공동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참여와 연대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공동체 공간을 구성할 때 사람들이 자주 마주칠 수 있는 공간 (텃밭, 도서관, 목욕탕, 수영장, 공용부엌 등)이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초반 미국 시카고 폭염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자 이를 사회적 불평등 관점에서 분석한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도시는 어떻게 삶은 바꾸는가>에서 '사회적 인프라'에 대해 설명한다. 사회적 인프라는 흔히 사람들 사이 관계를 칭하는 사회적 자본과는 다른 개념으로 사회적 자본의 발달 여부를 결정짓는 '물리적 환경'을 말한다. 튼튼한 사회적 인프라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지지하며 협력하기가 촉진되지만, 낙후한 사회적 인프라는 반대로 사회 활동을 저해하게 만든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코로나 시국은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다. 지역적 편차는 있겠지만 다양한 공공 공간이 사회적 인프라로 기능하고, 온라인에서 더 다양하고 풍족한 인프라를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프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거리두기와 방역, 코로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미 있는 사회적 인프라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 관계와 대인 네트워크를 가늠하는 데 흔히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사회적 인프라는 이와는 다른 개념이다. 사회적 인프라는 사회적 자본이 발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짓는 물리적 환경을 지칭한다. 튼튼한 사회적 인프라는친구들이나 이웃들끼리 만나고 서로 지지하며 협력하기를 촉진하는 반면, 낙후한 사회적 인프라는 사회 활동을 저해하고 가족이나 개개인의 자기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다. 사회적 인프라의 역할은 가히 결정적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 학교나 놀이터 혹은 동네 식당 등에서 벌어지는, 서로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이루어지는 지역적 교류가 곧 그들의 공공 생활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전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춘 장소에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이 같은 장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꾸준하게 만족해서 모여들 때, 특히 즐거운 일을 하며 교류할 때 관계 또한 필연적으로 싹트기 때문이다.

ㅡ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에릭 클라이넨버그, p. 11  


참여와 연대의 얼굴은 어떻게 변할까? 

  나아가 앞으로 우리에게 도래할 세상은 그렇게 복작복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선호하는 세상은 분명 아닐것이다. (지금만 해도 갑자기 사람 많은 공간에 가면 숨이턱턱 막히지 않나?) 백신을 맞고, 코로나가 종식된다 할지라도 사회는 더욱 개인화, 분열화될테고, 인구는 줄어들고 또 다른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얼마 간의 거리를 지키기를 선호할 것이다. 우리를 참여와 연대의 흥분에 몰아넣었던 광장도, 공동의 공간도 사라진 미래에, 참여와 연대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물론 이전에 비하면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사회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사회참여 방식(온라인 퍼레이드, 온라인 청원, 해시태그, 손글씨, 굿즈 구매 등등) 은 볼 때마다 새롭고 놀라울 정도다. 공간이 없어도 참여와 연대는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광장 혹은 집단의 효능감 없이 지속되는 사회 참여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얼마 전 친구 하나는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캠페인, 도대체 어떻게 기획해야 하는거야?’ 직접 참여해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캠페인을 만들고 싶은데 오프라인으로 만나지 못하지, 온라인 청원이나 해시태그 이런 거는 식상해진다. 소극적인 클릭이나 공유를 넘어서 궁극적인 사회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 효능감을 찐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고파진다는 친구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여기서 잠깐! 이런 소극적 클릭으로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을 비판하는 단어가 있다. 슬랙티비즘은 작은 노력최소한의 노력만 요하는 프로젝트나 명분을 위한 운동 (소심하고 게으른 저항방식)이란 뜻이다. 

더 읽기 : University of Waterloo 학생신문 COVID-19 and the rise of Slacktivism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코로나 확진자는 2,000여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를 갱신하는 확진자 수와 더불어 위드코로나도 발빠르게 준비중이다. 과연 마스크를 벗고 예전처럼 사는 삶이 다시 오게 될 지 모르겠지만, 오더라도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현실을 한동안은 디폴트default로 두고 참여와 연대에 대해 고민해 봐야할테다.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다시 광장에 모여 몸으로 부딪칠 때까지 시민의 참여와 연대가 필요한 문제들은 기다려 주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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