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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잠(稚蠶) VS 치잠 (治潛)

지난 9월에 일시적으로 인터뷰어 역할을 경험했다. 문화부의 문화특화지구사업, 국토부의 도시재생사업, 농식품부의 유휴시설 활용 창업지원사업 등 공공정책으로 지역마다 유휴공간 활용이 화두가 되고 있다. 

경기도 여주 하동에 위치한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와 부설공간인  잠업연구소도 그런 유휴 공간 중 하나인데 지난해 여주시가 매입하여 아카이빙작업을 시작했다.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가 그 일을 맡아 나는 그 곳에서 일했던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와 잠업연구소는 60년대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의 추진에 따라 세워졌다. 경기도 여주를 비롯 청평, 충북 괴산 등 곳곳에서 잠업을 장려하고 뽕나무 재배부터 누에를 키우고 되파는 고수익 작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양잠은 한 번 씨를 뿌리고 거두는데 일 년 여가 걸리는 벼농사와 달리 봄, 가을로 한 번씩 수확이 가능한 새로운 특용작물이라 교육이 필요했다. 

농촌진흥원에서 양잠교육이 이뤄지고 잠업기술을 수료한 졸업생이 지역 농가로 파견되어 집집마다 양잠을 보급하기도 했다. 그 졸업생 중엔 여성들도 꽤 많았다.     

뿐 만 아니라 민간기업 부설 연구소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 부설 잠업연구소에서는 농가에서 어떻게 하면 누에를 잘 부화시킬 수 있나?  누에가 일령, 이령, 삼령, 사령이 다 되도록 성장하여 다섯 잠을 자고 다 자랐을 때, 어떻게 하면 실을 잘 칠 수 있을까 ? 를 연구했다



누에씨 한 장이면 알이 보통 2만 여개나 되는데 일반 농가에서는 온도나 습도를 맞추기가 어려워서 부화율이 절반에도 못미쳤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어린 누에를 부화시키는 치잠사육을 전문적으로 실시해서 부화율을 99%로 올렸다.     

또 고치가 누에를 치는 공간이 기존엔 지푸라기로 얼기설기 만드는 수준이었는데, 연구소에서는 가로 세로 각이 반듯한 골판지 소재의 격자무늬형 섭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고, 뽕잎이 아닌 인공사료를 카이스트 연구진와 협력하여 개발해 내기도 했다. 

누에고치의 실을 생산하는데 원천 재료인 누에 생산을 위해 뽕나무 키우기부터 누에먹이 주는 법, 누에 키우는 방법 등등을 가르치고 누에가 고치를 안전하게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누에를 키우는 농가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고 그 덕에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는  양질의 누에고치를 농가로부터 수매해서 실을 생산한 것으로  수출탑을 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회사와 연구소가 설립된 지 10년 여가 지난 70년대 중반엔 경기도 누에고치 전체 수매량의 1/4 정도가 여주에서 나온 물량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과연 기업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 농가의 잠업 활성화를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봐야할까 ? 아니면 기업이 필요한 고품질의 누에고치실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간절한지 잘 파악하고 그에 맞춰 여주 농가를 학습시키고 공유한 결과일까? 

여주 농가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마지못해 했더라면 자본에 의한 도구화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60-70년대 워낙 어렵게 살던 시기라 경제적 숨통을 틔워주면서 일감과 소득을 동시에 가져다 준 당시의 양잠농가 프로젝트는 살아남기위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의미있어 보인다.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진리를 그 당시에  실천한 셈. 지금도 실효를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는 공공정책을 이미 60년대 중반, 직원이 다섯 명도 안되는 민간연구소에서 해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농가마다 잠업으로 소득을 증대하자는 목표가 공허하지 않고 집집마다 누에 두 장만 쳐도 자식들 학비를 댈 정도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너도 나도 빈터에 뽕나무를 심고 뽕잎을 따다가 누에를 먹였고 농가마다 연대하여 잠업 증산에 참여하였다. 

당시엔 요즘 같은 공유경제나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혼자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서로 배우고, 서로 돕고 서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나 보다.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와 잠업연구소라는 여주의 잠업시스템은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이 먼저 살아야 가능하고, 서로 서로 돌보는 생태계가 살아나야 자기들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체감하게 한다.    


 

그럼, 40여 년 전 사례이긴 하지만 잠업연구소의 역할을 2021년 문화예술계로 옮겨 와보자.당시엔 어린 누에를 키우는 치잠(稚蠶)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코로나19로 힘든 우리들의 지치고 고단한 일상을 치유하고 만사가 귀찮아 다 접어버린 우리네 잠재력을 일깨우는 치잠 (治潛)으로 전환시켜 보는 것이다.    

누에 한 장 마다 2만개의 알에서 누에가 깨어 나오는 치잠율이 낮아 잠업연구소에서 2주 동안 공동으로 키워줬다면 작품의 시장 접근을 혼자서 하기엔 어려운 경우 한국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 예술인복지재단, 각 지자체의 문화재단, 그리고 예술교육진흥원, 각각의 공간 등에서 기관별 각개전투가 아니라 국제교류, 마케팅, 브랜딩, 기업 일감, 공공적인 일감, 축제 일감 등등 주제별로 분류화하여 여러 기관이 협업하는 구조의 TF를 가동하는 것이다. 

마치 치잠 사육때 온도와 습도를 생장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만들어주듯이 서로 서로 잘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더 잘 할 수 있도록 예산을 줄 수 있는 곳은 예산을 주고, 공간을 줄 수 있는 곳은 공간을 지원하고, 해외진출을 모색해 줄 수 있는 곳은 국제교류를 거들어주고 네트워크가 강점인 곳은 연결해 주고 말이다.     

마침, 옛 동숭아트센터 터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예술인들의 공간인 예술청을 문 연 시점이라 예술청이 서울시, 서울문화재단만의 고유 공간이 아니라 각 기관마다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헤쳐모여 식으로 모일 수 있는 협업 공간을 상상해 본다.

그러기를 십 여 년 정도 한다면 서로 서로 관계를 이어가며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만나고 연결되며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K콘텐츠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때, 예술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를 다양하게 발굴해 서 한쪽엔 수요 플랫폼을 만들고 또 한 편엔 예술가들의 창작 플랫폼으로 조성하여 

다리역할을 곳곳에서 작동하게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예술분야보다 예산이 몇 배나 많은 컨텐츠진흥원, 국토부, 농수식품부, 행안부, 교육부, 과기부, 복지부, 등 다양한 부처 중 문화예술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발굴해 소개하고 연결하고 설득하고 제안하는 플래너, 혹은 코오디네이터가 절실하다. 



혹시나 하고 가능성을 슬쩍 비춰보니 기관 간 협력은 꿈도 꾸지 말란다. 

잘 된 공을 독차지해야지 어느 기관이 그 공을 다른 기관과 나누느냐는 반격이다. 

한 기관에서 혼자 잘한 거 보다 여럿이 더 잘하면 그 공이 더 빛나지 않을까?

싶지만 내 말은 공허하게 되돌아온다.

60 -70년대에도 잘 되던 연대와 협업이 왜 21세기엔 이렇게 어렵고 더딘걸까?

특히나 코로나19로 나 혼자만 건강해서도 안되고 모두가 건강해야 나도, 내 가족도 건강할 수 있다는 걸 어느 때 보다도 더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을 돌보고, 함께 한다는 일은 멀기만 하다.     

누에가 다섯잠을 자고 한창 클 때면 뽕잎을 먹는 소리가 워낙 커서 한여름 소낙비가 오듯이 ‘솨악솨악’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무섭게 먹어치우는 생명력에서 투명하고 맑은 하얀 명주실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새끼 손가락만한 누에 하나에서 나오는 실의 길이가 무려 1,300 미터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잠재력, 내가 아닌 남을 거들고 함께 하고 으싸으싸 하는 역량도 

수 천미터의 길이로 무궁무진한 건 아닐까? 

창조성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조슈아울프 쌩크작가는 

‘둘의 힘’에서 강조한다. 

미처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꺼내는 역할 또한 예술의 몫이 아닐지?  

치잠(稚蠶)에서  치잠(治潛)으로의 전환을 상상해본다.    


* 본문은 2021. 월간 춤 10월호에 동시에 실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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