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현재 전공은 중국어다. 아무래도 중국어를 전공하기에, 중화권에 대한 관심이 많다. 다른 학우들은 중국 고문이나 중국 현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만, 나는 특이하게 대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 어찌보면 당연한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도 대만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중국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대만에 관심이 많아 대만의 역사나 현재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데, 대만일치기가 끝난 뒤 대만의 역사를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오늘 소개 할 비정성시이다.
영화 비정성시는 1945년 대만일치기가 끝나고 갑작스럽게 대륙(중화민국)으로 귀속되어 혼란스러웠던 대만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타이완으로 건너온 한족과 그들의 후손을 본성인이라 부르며, 일본 항복 이후부터 국부천대까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국부천대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대륙인들이 대만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기존 대만에서 살고 있던 본성인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사건이 영화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의 배경인 2.28 사건이다.
청나라는 대만을 200년 넘게 영유했다. 청나라는 대만 섬을 일본에 양도하기 직전인 19세기말을 제외하면 대만 섬 통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이는 대만인이라는 개별적인 정체성 형성의 새싹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고, 대만섬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대만 섬의 한족들은 이에 저항하여 타이완 민주국을 수립하고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 저항이 실패하면서 타이완 섬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 영화를 보면 광영과 지식인들의 대화에서도 “청나라도 우리를 무시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잖아”하며,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만 사람들은 해방과 동시에 식민통치하의 ‘2등 국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고, 영화에 나온 장면처럼 처음에는 국민정부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일본의 항복 후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도착하기까지 약 50일 정도의 정치적 공백기가 있었고, 그 공백기 동안 지방 지도자들과 지식인, 청년층 등이 자발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간단체를 조직하며 국민정부를 기다렸다.
1. 중화민국 대만, 갈등의 시작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던 대만 본성인 들은 이미 중국인 정체성이 옅어졌다. 식민통치를 시작한 날 태어난 아이는 이미 50세 중년이 되었을 테고, 대만어(臺語)와 일본어만 구사할 줄 알지 부통화(普通話)는 한마디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루 사이에 갑자기 중화민국의 국민이 되고, 본성인이 아닌 국가 주요 관직에 생전 모르는 중국 본토에서 온 외성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을 통치하기 시작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일제 식민통치자들이 빠져나간 관직을 대부분 외성인 출신자들이 차지하면서 주요 정치인사들을 외성인들이 독점하고 본성인들은 지방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독특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당시 외성인들이 대만에 들어오면서 관료 등용에서의 본성인 차별, 외성인 관료의 부정부패, 경제위기 등으로 국민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국민당 정부는 대만인의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본토 출신 천이(陳義)를 최고 경영자로 파견하여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는 막중한 책임을 주었다. 하지만 중국 대륙 내 국공내전의 물자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만 내 자원을 대륙으로 보냈다. 이로 인해 치솟는 물가와 심각한 실업으로 인해 대중의 불만이 끓어오르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당시 국민당이 대만에 들어온 1946년에는 대만의 쌀 값이 원래 가치의 100배까지 올랐고, 이는 상하이의 4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228 기념관에 전시 되어있는 당시 신문)
2.
2.28 사건과 과거청산
이들의 불만과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2.28 사건이다. 1947년 2월 28일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를 팔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단속되고 폭행을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본 본성인들은 외성인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이 분노가 2.28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이 시기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에 가담한 본성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게 된다. 1992년 본성인 출신 총통인 리덩후이(李登輝) 정부에서야 비로소 "2.28 사건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이 당시 18,000명에서 28,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어찌 보면 2.28은 예견 가능한 사건이었다. 이미 중국 대륙에서 힘을 잃어가던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했고, 국민당 고위층들과 본성인 고위층들에게 모두 관직을 나눠 주기에는 대만은 너무 작은 섬이었다. 그리고 국공내전 기간 동안 어떻게든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대만의 자원과 경제를 착취했다. 그리고 이는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민주화 이전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과 권위주의적 통치하에서 반공논리에 의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다. 이는 공산주의로부터 체제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그 정당성이 유지되어 왔고, 2.28 사건도 반공논리로 그 정당성이 유지되었다. 대만의 독재정권 시절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금지된 사항이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 또한 금지했다. 하지만 1971년 중화민국의 유엔 퇴출과, 1978년 미국과의 단교로 국가의 정당성 위기가 제기되었고, 민주화와 자유화의 요구도 높아졌다. 1987년 대만 섬 내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민주운동가들은 2.28 사건의 과거청산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2.28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1988년 <연합보>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약 85%의 응답자가 2.28 사건에 대해 모른다 답했으나, 민주화가 진행 중인 1992년 설문조사에서는 80% 이상의 응답자가 2.28 사건을 알고 있다 답했다. 이후 1992년 민진당 주도하에 2.28 사건의 과거청산이 이루어졌고, 본성인 출신이자, 2.28 사건 피해자였던 리덩후이 총통의 협력으로 국가적 사과와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3. 2·28 사건 처리위원회
영화에도 나오지만 2.28 사건 동안 대만의 지식인층은 여러 2.28 사건처리위원회가 출범시킨다. 영화에서도 관영이 이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고, 국민당 정부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2.28 사건처리위원회는 32가지 요구사항을 국민당 정부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행정장관이었던 천이(陳義)는 본토 국민당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대만에 상륙한 국민당군 2개의 사단은 대만을 초토화시킨다.
이 지식인들은 국가에 반대하고 국민당의 치부를 드러내려 한다는 이유로 숲으로 들어가 숨어서 위원회 활동을 했다. 이로 인해 대만은 1949년부터 1992년까지 약 40년간 계엄령 상태로 있게 된다.
이 시기 동안 10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었고, 1,000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현재 2.28 사건조사위원회는 대만 독립주의 ‘대독(臺獨)의 근본이 되는 단체로 평가되고 있다. 대만 정채성으로 대만 중심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이 위원회가 요구한 32가지 요구사항 중 “臺灣行政長官公署,應改為本省政府制度,但未得中央核准前暫由二,二八處理委員會之政務局負責改組,用普選公正賢達人士充任 (모든 정부 위원(장관)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라는 요구사항이 있었다. 민주적으로 대만인이 뽑은 지도자를 요구한 것이다. 국민당 정부가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아닌 대만인이 뽑은 대만의 지도자를 원했고, 현재 대만은 그런 나라가 되었다. 물론 대만이라는 명칭의 국가가 아닌 중화민국이지만 본성인도 투표를 통해 당당하게 총통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4. 대만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1940년도 후반 대만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영화 비정성시에서는 2.28 사건 당시 본성인이 외성인인지 아닌지 구분할 때 대만어와 일본어 질문을 하고 말하지 못하면 외성인으로 간주했다. 당시 외성인들의 출신지역이 푸젠성, 광둥성, 저장성 등 중국 남부지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대만어는 민난어의 일종이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가능했기에 외성인 중에서도 대만어를 흉내 낼 줄 알았던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대만어와 일본어를 함께 물어보며 본성인인지 외성인인지 구분을 했다. 1947년 외성인과 본성인의 서로에 대한 구분이 갈등의 불씨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외성인 입장에서는 본성인도 중국 대륙에서 왔고 조금 더 빨리 온 것뿐인데 왜 주인행세를 하냐고 불만을 터트릴 수 있다. 본성인 입장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버릴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우리 본성인들이 살고 있는 땅 대만에 갑자기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냐고 불만을 터트릴 수 있다. 어찌 보면 두 입장 모두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일어나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대만에서는 본성인인지 외성인인지 구분을 하지는 않는다. 1992년 이후부터 대만 내에서 호적으로 인구통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이미 본성인이 대만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의미가 퇴색됐기 때문이다. 본성인이든 외성인이든 현재는 대만인이면서 중화민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 사실 본성인과 외성인 둘 다 출신 지역은 중국 대륙이다. 누가 먼저 들어왔고, 어떤 시기에 들어왔냐가 다를 뿐이지 중국 대륙에서 온 한족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2022년에는 외성인 출신이거나 외성인 2,3세대들이 대만인 정체성을 느끼는 경우도 많아졌고, 심지어는 진먼(金門)이나 마쭈(馬祖), 펑후(澎湖)와 같이 대만 섬 밖 중화민국의 영토 국민들 중에서도 대만인 정체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서로 간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고 이제는 둘 다 대만인이라는 공통점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5.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대만의 정체성 정치
대만은 다당제 국가이다. 물론 말이 다당제지 한국, 미국과 비슷하게 양당제적 성격이 강하다. 대만에는 두 개의 거대 정당이 있는데, 영화에서도 계속해서 나오는 보수정당 국민당(國民黨)과 진보정당인(民進黨)이 존재한다. 이 대만 정당체제에서 핵심적인 이슈는 오랫동안 국가적 정체성이었다. 국민당은 권위주의 통치 시기였던 장제스, 장징궈 시기에 국가통합을 위해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강조했고,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美麗島事件)으로 시작된 민주세력인 민진당은 대만의 자주성과 독립을 주장하면서 대만인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민진당은 대만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부각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2000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대만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전체 대만 총통선거 결과를 대만국립정치대학의 대만인 정체성 여론조사와 비교해 봤을 때, 대만인 정체성이 강해질수록 민진당 총통 후보의 득표율도 함께 높았었다. 대만인의 정체성을 느끼는 유권자가 늘어남에 따라 국민당이 아닌 민진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당의 지지율 결집과, 이슈몰이가 가능한 대만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정당들이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중화주의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는 국민당 입장에서는, 국민들이 대만인이라는 별개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한편 대만인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국민들과, 국민당의 대선후보의 지지율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만, 그 관계는 민진당 지지율과 대만인 정체성의 관계만큼 확실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줄어든 대만 내 중국인 정체성으로 인해 정체성 정치보다는 보수적인 경제관과 중국과의 관계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프레임을 갖고 선거에 나서고 있다. 이 전략을 가지고 승리한 선거의 대표적인 예시가 2018 대만 지방선거였다. 대만인 정체성을 부각하는 민진당이 아니꼬운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국민당 정권일 때는 경제적 유화책을 쓰지만, 민진당 정부일 때는 대화조차 거부하며 경제적 불이익을 준다. 그러다 보니 천수이볜과 차이잉원(蔡英文) 정부의 초반부인 2000년과 2016년 대만의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진당의 대만인 정체성 강조와 중화민국 정체성 지우기인 정명운동(正名運動)과 같이 중국인 정체성을 대만인 정체성과 동시에 느끼는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정책에 열을 올리면서 민심을 잡지 못했다.
이를 이용해 2018년 대만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경제정책과 지역 교통 인프라 청책들을 내세우며 많은 표심을 얻었고, 민진당의 우세지역인 가오슝에서 국민당 시장인 한궈위(韓國瑜)를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이러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대만인의 대만인 정체성은 중국의 행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019 홍콩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고 중국이 일국양제를 무시하고 홍콩 민주파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홍콩인에 대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만인들은 중국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다. 이는 하나의 중국과 92 공식을 지지하는 국민당에게 난처한 상황을 만들었다.
마잉주 정부 때 급진적인 친親중국 정책을 펼치고, 하나의 중국을 외치면서 국민당은 친중親中정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실제로 2020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인 한궈위는 홍콩 민주화운동 이전까지 만해도 민진당 후보인 차이잉원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층을 보여줬지만, 홍콩문제가 심화되면서 지지율이 줄어들고, 반대로 민진당의 차이잉원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이 선거를 보고 국민당의 한계가 드러났다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민진당 정부가 정책 헛발질을 하고, 경제성장이 더뎌도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이 압도적인 사회에서 친중親中, 중국인 정체성, 중화주의를 내세우는 국민당은 중국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노선 정리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선거 패배 이후에 화독(華獨) 성향의 장지천을 새 당대표로 선출했다.
6. 마무리하면서
2006년 2.28 기금회가 작성한 ‘2.28사건책임귀속연구보고(二二八事件責任歸屬研究報告)’에 의하면 장제스(蔣介石)가 당시 시민들을 유혈 진압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물을 제시했다. 2007년 대만 입법원에서는 ‘보상’이라는 단어가 아닌 ‘배상’이라는 용어를 택하며 국민당의 책임을 강조했다.
대만 타이페이의 랜드마크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앞에는 2.28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막힌 자리선정이라 생각한다. 2.28사건의 주동자인 장제스를 기념하는 건물 바로 앞에 2.28 희생자를 기억하는 공원이 있다는 게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개인적으로 장제스를 독재자이자 학살자라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대만 내에서는 장제스를 경제부흥과 안보를 지킨 국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많은 시민들을 이유 없이 학살하고 약 40년간의 이어진 계엄령을 선포해 대만인들의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민진당 정부가 추진하는 정명운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는 명칭이 타오위안 국제공항인 이곳도 원래 이름은 중정 국제공항이었다. 중정기념당 역시 과거 천수이볜 정권에서 국립대만민주기념관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마잉주 정부에서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바꾼 전례가 있다. 그리고 다시 정권을 잡은 민진당의 차이잉원 정부의 행정원 산하 기구인 '이행기정의촉진위원회'가 장제스 동상을 철거하고, 중정기념당의 이름을 '권위주의 반성 역사공원'으로 변경한다는 계획 초안을 공개했다.
개인적으로 독재자를 기념하고 동상까지 세운 곳이 랜드마크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차이잉원 정부의 계획에 크게 찬성하는 입장이며, 가능한 한 빨리 중정기념당을 바꿨으면 한다.
영화에서 보았듯이 2.28 사건은 많은 대만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은 큰 사건이다. 단순 2.28 사건뿐만 아니라 국민정부가 대만에 오면서부터 지각변동은 시작됐다. 나는 단순히 국민정부가 대만에 온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장 권위주의 정부의 국민 탄압과 독재는 합당화 될 수 없는 역사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 이후 대만의 정체성 문제나 사회문제의 시작은 2.28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실화라면, 문청의 아들은 현재 70세가 넘은 노인일 것이다. 임아록 집안의 ‘붕괴’는 대만 사회의 붕괴와 같았다. 그 붕괴된 사회에서 문청의 아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붕괴된 대만 사회에서 굳건히 잘 살았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라고 정의했을까? 다양한 궁금증이 생긴다.
물론 현재 대만은 본성인의 문화와 외성인이 가져온 중국 본토의 문화, 원주민들의 문화가 잘 융합된 대만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지금 대만이라는 나라는 이들의 융합과 갈등, 조화와 충돌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만만의 문화가 아름답다 생각하든 이상하다 생각하든, 그 문화 속에서 대만인들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