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게 돼버렸다.
군대 가기 전까지 나는 마른 편이었다. 군대 신체검사를 받았을 때 키는 184를 넘었지만, 몸무게는 60KG였다. 샤이니를 좋아하는 소녀들도 나를 본다면 말라깽이라고 놀렸을 것이다. 뼈 밖에 없는 사람인데 입대해서 훈련은 잘 받을 수 있을지 한동안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입대까지 100일의 시간이 남았고 나는 살을 찌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인터넷으로 방법을 검색해보니 답은 아주 간단했다. 자주 많이 먹으라고 했다. 입이 짧은 나는 오로지 살 찌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에 5끼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결국 73KG의 몸무게로 입대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목표를 세우고 이룬 기억은 그 일이 처음이다. 내가 독해지기 시작한 것도 증량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던 토스트를 든 내 손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 그리고는 "독하게 살지마,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인생 그냥 하루하루 즐겨!"라고 말해주고 싶다.
군대는 병사들끼리 보이지 않는 약속이 있다. 우리 부대는 상병으로 진급하면 주체적으로 PX와 체련단련장을 갈 수 있고, 책이나 TV를 볼 수 있었다. 일병까지는 오로지 선임의 동행이나 지시를 받고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상병 진급 신고를 마치자마자 TV다이 앞으로 걸어갔다. TV다이와 일체형으로 연결된 나무 책장의 나무 미닫이 문을 열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읽을 책을 신중하게 골랐다. 진부한 제목의 자기 계발서들 틈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집어 들었다. 제목도 흥미롭고 표지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응당히 내게 부여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기에 내 관물대 앞까지 떳떳하고 씩씩하게 걸어가 앉았다. 내 동기들은 하나같이 TV 앞으로 몰려가 TV를 봤지만,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 새끼 왜 저래?" 동기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향해 수군거렸다. "내 인생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새끼들아.."속으로 말했다. 군대 갈 때 세운 내 목표는 책 100권 읽기였다. 그 시작이 군대를 입대한 지 1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지는 콧등이 시큰한 순간이었다.
군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면, 1시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식사를 마친 동기들은 모두 PX로 향했다. 상병 단 기념으로 PX에서 다과 파티를 하는 게 전통이었다. 파티가 아니더라도 PX를 갈 자유가 생겼으니 굳이 안 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식당 옆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입대 전까지 인생 대부분은 마른 남자로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적당히 마르면 좋겠지만 빼짝 마른 건 남자에게 좋을게 하나도 없다. 마른 콤플렉스를 군대에서 극복하고 싶었다. 군대 가기 전엔 단순히 살만 찌워놨고 입대해서 벌크업을 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상병으로 막 진급한 나에겐 TV와 책, PX와 체력단련실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TV와 PX를 택하는 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저 그런 놈으로 남겠다는 포기였고, 책과 PX를 택하는 건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의지였다. 그 선택에 갈림길에서 보시다시피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바꿨다고 말하겠다.
군대에서 저녁식사를 안 하는 건 명령 위반이다. 식사를 거부해서 영창 간 사례는 보지 못했지만, 고참이나 간부에게 걸리면 심한 갈굼을 당한다. 그래서 보통 말년 병장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가되 식판에 아주 조금 음식을 떠서 한 두 숟갈 뜨고 바로 PX로 향한다. 싸제(사회) 음식을 지금부터 먹어놔야 전역해서 탈 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들에게 식당을 가는 행위는 단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전역할 때까지 저녁식사를 배부르게 먹었고, 식사 후 PX를 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면 운동하고 싶은 일이등병을 데리고 식당 옆 체력단련실로 달려가 운동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철봉을 제일 좋아한다. 상체 근육을 가장 빠르고 종합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정확히 스물두 살이 되던 해 7월 1일이다. 인생을 바꾸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오로지 의지 하나였다. 부작용은 혼자 하는 독서, 혼자 하는 운동에 익숙해지면서 자의적 은둔형 인간으로 진화했다. 더 이상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이다.
전역하기 전까지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책의 제목을 수첩에 기록했고 전역하기 전까지 100권의 책을 넘게 읽었다.(그 수첩은 본가의 내 책상 서랍에 아직도 보관 중이다.) 전역 후 복학했을 때 같은 과 동기 여학생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은 그대론데 몸이 두배가 돼서 돌아왔기 때문이다.(싸이월드와 네이버 웹하드, 내 스마트폰에 그때 사진이 남아있다.) 입대 전에 내 마른 모습에 익숙했던 남자 선배가 나에게 몸무게가 80KG가 넘냐고 물어봤다. 몸무게는 73KG 그대론데 근육 때문에 벌크업이 돼서 몸무게가 많이 나가 보였나 보다.
나는 군대에서 시작한 운동과 독서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인생 한 번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신념의 날갯짓이 지성과 체력을 얻게 했고 홀로 된 삶을 향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외로움의 낭만을 즐기게 만든 것이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