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 늦겨울이었다.
회사의 직원들과 급한 업무들을 마무리하고 저녁식사 겸 술 한잔하기 위하여 대전의 어느 백화점 근처에 있는 일식집에서 약간의 취기가 느껴질 정도의 알코올로 몸을 데우고 거리를 걸어볼까 하여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2024년 12월 23일, 성탄절이 가까워와서인지 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하고 간간이 인근의 옷가게에서 캐럴을 들을 수 있었다.
힘들어진 경제 탓인지 이제는 12월이 되어도 사람들의 모습에서 예전만큼의 활기나 밝음을 찾아볼 수는 없다.
간혹 들려오는 사춘기를 갓 지난 여고생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그나마 분위기를 돋워 줄 뿐이다.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에 취해있을 즈음에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누굴까… 여기서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잘 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기대감 없이 뒤돌아 보았다.
그런데, 오래전에 소개팅에서 만났었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젊은 시절 나는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존재였다. 그래서, 소개팅을 할 때에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에 15년 전 대학시절에 그녀를 만나게 되었던 단체 소개팅에서 나와 그녀 간에 인연을 끈을 기대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파트너였다.
소개팅에서의 짧은 만남은 그녀를 기억할만한 어떤 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은지’라는 그녀의 이름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내가 돌아보아 보았을 때 그녀는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몹 쓸 심장이 갑자기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혀버린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지민아, 오랬만이네’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어떻게 그녀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오랬만이네’ 나도 웃음 띤 모습으로 인사를 했지만 어쩔 줄을 몰라하는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는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많이 놀랐지.. 나도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세상이 너무 좁은 것 같아’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친구들과 식사하고 헤어지고 나서 그녀도 거리를 무작정 걷고 있었다고 했다.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술 한잔을 할 거라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내가 그 사람이었다.
술집의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본 그녀는 미소가 예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득 미소에 감추어진 그늘이 간간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차피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헤어질 인연인데 굳이 그녀의 삶에 깊이 들어갈 마음은 전혀없었다.
몇 잔의 술이 서로의 경계를 순식간에 허물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울음에 어찌할지 몰라서 한참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어려움이 있다고만 했다.
지금 죽을 만큼 너무 힘들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마치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 마냥 그녀는 혼자 많은 말들을 했다. 때론, 웃기도 그러다가 울기도 했다.
아마도 2시간 정도를 들어주었던 것 같았다.
몇 병의 술과 묵은 감정의 토해냄은 그녀를 더 이상 가눌 수없을 지경까지 이끌고 갔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평안한 모습으로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왠지 모를 보호본능이 나를 자극한다. 인근의 호텔에 그녀를 누이고 나서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궁금증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아침 일찍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는 그녀는 이미 아무런 쪽지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린 뒤였다.
그녀의 흔적을 알 수 있는 헝클어진 침대만이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