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부모간병으로 일상이 바쁜 50대 지인들을 보며
40대, 우리는 날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우리지만 나의 이야기는 없고 자식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어제 들은 것같은 이야기를 오늘 듣고 오늘 들은 이야기를 내일 또 들을거지만 자식이야기는 지겹지않았다.
이제 50대, 아이들은 촌스러울 정도로 큰 대학로고가 붙은 점퍼를 입고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그래도 자식이니 그 소재가 없어질까싶었지만 애증이 교차했던 사춘기시절, 상전아닌 상전으로 군림했던 수능준비시절을 지나고 나니 아이들 이야기는 시큰둥해졌다. 가끔 들리는 자식들 연애소식도 이젠 시큰둥하다. 코로나를 지나서인지 연애도 서툴어 늘 비슷한 애들끼리만 뒹굴거린다는 푸념만 들릴뿐이다.
늘 자식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던 우리의 대화는 이제 오롯이 우리에게로 향하려나?
하지만 나를 찾기가 어색한 우리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빈 시간이 부담스러워졌다.
자식이 더 이상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 누군가는 나를 찾아야한다고 조언했지만 우린 나의 존재찾기보다 새로운 일자리찾기가 더 쉬웠다. 그래서 한동안 주제는 일자리였다.
'뭐 할거 없을까?'
'아이돌보미? 내 애 키우느라 지쳐서 난 이제 애라면 진절머리가 나~'
그렇게 한동안 서로에게 쓸만한 조언을 던져주지도 못한 대화들이 풍선마냥 불었다 퍼졌다를 반복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 둘씩 정기 모임에 빠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파킨슨이야. 혼자 식사를 잘 못하시네'
'아빠가 암진단 받았어. 수술해야한대'
'수술을 해야하는데 딸만 찾아. 나보고 내려오래'
'일주일에 3번 투석을 받는데 데려갈 사람이 없어'
이렇게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부모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효리씨가 엄마랑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 나온 후엔 같이 여행을 가자는 친정엄마들도 생겼다. 아파서 오라는 부모에 비하면 여행동행불만은 행복한 투정이다.
어쩌다 딸로 며느리로 간병과 씨름하다 돌아온 이들은 지친 모습 일색이다. 정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초췌하고 고집스러운 아픈 노인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부모를 대면하는게 힘들었고 아팠다고했다. 그래도 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숨쉴 구멍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하고 함께 살며 돌보는 이의 힘듬은 말로 하기 어렵다.
나는 아무 투정도 하지 않는다.
왜?
난 다 끝났기때문이다.
그래도 꼭 이 말은 해준다.
'힘들지, 많이 힘들거야. 나도 매일 울고 지냈어.
그런데 말야,
너희들보다 먼저 양친을 하늘나라에 보내드린 경험으로써 말하는 건데 절대 후회는 앞서지 않더라.
힘들어도 아파도 너무 티내지말고 최선을 다해 사랑해드려~~
그게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야'
나의 친정부모님, 시어머님 (시아버님은 결혼 전 이미 소천) 세 분 모두 10년을 넘는 병원생활을 하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긴 병에 효자없다고, 난 많이 툴툴 댔다. 집에 계시기 힘들어지며 모두 요양병원으로 가셨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요양병원 비용은 오롯이 가족의 몫이었다. 맞벌이지만 매월 몇 백만원 넘는 요양병원 비용은 힘들었다. 솔직히 돈문제가 제일 힘들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그 모든게 후회스러웠다. 그립기만 했다. 죄송하고 슬펐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부모님 병간호로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힘들어하는 50대는 더 많아질 거다.
그리고 늘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어디서든 언제든 부르면 달려갈거다.
연로한 부모님이야기를 하며 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만 보면 안다.
왜냐고?
사랑하니까.
우린 그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부모들의 연약함 앞에 가슴아파하는 착한 50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