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으면 됐지뭐~
배산임수의 형세를 지닌 곳.
작고한 전직 대통령이 퇴임 후 살려했다는 풍문이 전해지는 곳.
처음 와 본 사람은 외국 온 것 같다며 모두 놀라는 곳.
서판교, 내가 사는 동네다.
관악구 봉천동, 아파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던 딸이 서판교 주택으로 이사와서 하는 말
-엄마~ 봉천동은 가만히 있어도 안 심심한데 여기는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심심해~~'
-대박~ 엄마 논이 보여.
그 심심한 곳을 아이들은 너무 좋아한다. 전학온 첫 날 아들반 아이들이 과자를 사주겠다며 동네 작은 슈퍼에 데려갔단다. 그런데 사주는 아이가 아들에게 하는 말.
-너는 오늘 전학왔으니 두개 사줄께~
이 한마디에 소심한 아들은 너무 조용하고 심심해 시골인가 싶어지는 우리 동네에 마음을 뺐겨버렸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은 정말 심심했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더 그랬다.
일찍 아이친구맘들끼리 친구가 된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한 동네 살면서도 외지인같은 기분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사는 속내를 보지 않고 사는 동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식상해졌다.
-그 집이 그집이지뭐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 그랬다.
뭘해야할 지 몰라하는 사이에 야속하게도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다.
그래도 그간 해온게 있는데 알바정도는 쉽게 구하겠지싶었다.
물론 전문성을 살린 알바. 하지만 구하기 힘들었다.
홍보,광고,마케팅,미디어분야는 젊은 친구들이 독식하다시피하고 있어 내게까지 기회가 오질않았다.
그 때쯤 배달알바 광고가 쉴새없이 폰에 떴다.
광고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끈질기게 무슨 서비스를 클릭하든 구인광고가 떴다.
-뭐해요? 할 일도 없으면서 운동도 할겸 쉬엄쉬엄 배달하며 용돈벌어봐요~~~
운동하면서 용돈도 번다는 말은 다이어트가 필요한 50대주부의 알바욕구를 바로 저격했다
내 안에 흐르고 있던 배달의 민족 DNA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만든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러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보니 어릴 때는 많은 배달을 하고 살았다.
어른이 시키는 것이니 심부름이라는 명목이지만 실은 배달이다.
음식배달, 물건사오기,작업한 일감 갖다주기 등등
심부름 간 집에선 늘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집에서는 잘햇다며 용돈을 받았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배달의 민족, 이거야말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확신에 결국 난 앱을 깔고 말았다.
배달수단은 자가용. 그것도 연비 아주 안좋은 자가용
앱에서 몇 가지 단계를 거치고 나니 바로 배달 콜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은 단순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고객집 현관문앞 혹은 직접 전달하고 결과를 앱에 올리면 끝.
비용은 3000원~7000원.
하루에 몇 건만 하면 3만원정도 벌이가 됐다, 물론 하기 나름이지만.
한 동네라해도 아는 사람없으면 한번도 가보지 못한 집들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왜 나는 이런 것에 재미를 느끼는지.
유독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듣는 것을 참 재미있어한다.
그래서 드라마를 좋아하나보다.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음식을 시키는 지, 누가 사는 지, 집구조는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 내겐 너무 흥미로왔다.
나의 MBTI는 ENFP다.
그런 사람이 하루 종일 조용히 책이나 읽고 어쩌다 사람만나 수다떠는 정도로 지내는 일상이 성에 찼겠는가.
당연히 배달의민족이 되는 것이 더 흥미로울밖에.
횟수가 조금 늘어나니 우리 동네 배달알바가 식상해졌다.
배달 지역을 넓혀봐야지 하는 욕심이 생겼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을 아주 힘들어하는 기질이 발동을 걸었던 것이다.
배달 설정지역을 확대했다. 분당 구도심으로.
물론 멀리 배달하면 배달비도 상승한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구도심은 서판교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서울 봉천동에 온 것 같았다.
주소 하나 달랑 검색에 걸어두고 연비 안좋은 차를 몰고 가 생소한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그 집이 그 집같은 동네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곳은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대충 이 아파트 옆에 저 아파트 이렇게 가늠이 되는 동네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소 하나 찍고 달려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달해주고 돌아오던 배달AI 알고리듬이 엉키기 시작했다.
배달음식은 밝은 대낮보단 어스럼한 저녁에 더 시킨다.
어두운 골목길, 배달만을 목적으로 지하에서 식당을 하는 곳을 찾아갈 땐 오싹하기까지했다.
드디어 나의 감성에 밀려 충실한 시녀노릇을 하고 있던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운동삼아 하려면 걸어다니며 해야지. 연비 안좋은 자가용 몰고 다니며 운동은 커녕 용돈벌이가 되는 건 맞아?'
몇 번의 혼쭐이 나고서야 결국 구도심에서의 배달알바를 접었다.
다시 우리동네로 지역을 조정해보았지만 이미 들뜬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있어 계속할 기분이 이니었다.
배달앱을 지우고야 말았다.
용돈도 못벌고 시행착오만 겪은 내가 실망스러웠다.
그럼 이건 내 인생에서 지워야할 흑역사가 되는 것인가?
물론 손익을 따져보면 마이너스고 중간에 포기했으니 흑역사지 싶다.
누군가는 굳이 배달알바라며 비웃을 지도 모를 그 일을 왜 그렇게 하려고 했을까?
나는 돈버는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사람을 만나고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본캐인데 본캐는 사라지고 무위도식하는 부캐만 살아있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 우울했고 주눅이 들기도 했다.
좀 더 색다른 마음치료약이 필요했을 때였다.
남들은 굳이 그런 일까지라고 할지 몰라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이유로 댓가를 받는 일을 하는 것이 그 당시 내겐 좋은 치료약이 되어줬다.
그것이 비록 가볍게 마시는 커피 한잔 값에도 못미치는 거지만,
댓가를 받을 수 있으면서 인사를 나누고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의미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다시 할 생각있냐고 한다면 난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할거다.
그 돈받고 배달할 바에 비싼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비웃을 이도 있겠지만.
가끔 한 잔에 7,000원 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도 마시고 시간이 나면 3000원 주는 배송알바도 할거다.
왜냐고?
재밌으니까!
글을 쓰고보니 진짜 배달하러가고 싶다.
누군가 벨을 눌러주는 일이 드물어지는 요즘, 배달왔어요 라며 따뜻한 인사를 나눠주면서.
이번엔 연비불량 자가용말고 두 다리로 직접 가져가는 배달을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