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에 일어나 자정이 다되어서야 잠이 드는 만년 현장기자님이 통장을 하겠다니, 버럭하려고 눈을 쳐다보니 어째 눈빛이 너는 그거 못봤냐는 투다.
당연히 봤지. 우리 동네에 한동안 걸려있는 현수막
'운중동 19통 통장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더 당연하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기사 쓰는 것도 버거워 다크서클이 가실 날이 없는 자가 통장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모두 나를 겨냥한 포석이었다.
-나?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너무 한거 아냐?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보여?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남편이 던진 한마디를 잽싸게 낚아채서 바로 수십발의 포를 쏘아댔다.
-아니, 맨날 혼자서 성경읽고 기도만 하면 뭐해? 나가야지~~~~나가서 섬겨야지!!!!!
항상 저 조소가 가득한 지적질에 말문이 닫혔다. 말이야 바른 말이니깐. 무엇보다 내가 안하겠다고 하면 당장 본인이 통장지원서를 내러 갈 태세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가 동했다.
'뭐지? 이건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일까?'
나의 최대의 장점이자 약점이 귀가 얇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정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가끔 나를 하수취급하며 던지는 남편의 조언이 그날도 먹혔다. 평소 말이 없는 인사인지라 어쩌다 던지는 실없는 말도 항상 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을 해도 할 아내가 집에서 허송세월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이력서를 썼다.
'이력이 뭐가 이렇게 화려해?' 통장하는데 필요없다 싶은 걸 쭈욱 지웠다가는 우쭐한 마음에 다시 다 썼다.
'이 이력을 갖고 왜 통장을 하려하냐, 통장이 되면 하고 싶은게 뭐냐'... 혼자서 가상의 질문들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예행연습을 혼자서 살짝 하긴 했지만 솔직히 좀 거만한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통장 해주는 마음으로.
진짜 나에게 교만은 불치병이다.
면접관들이 미심쩍은 눈빛을 비쳤지만 지원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며 난 운중동 19통 통장이 됐다. 안될 수도 없었던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결격사유가 없지않고는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원자가 나밖에 없었다. 주택가에선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아 통장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한동안 공석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전 통장은?'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하도 자기 집 앞에 '운중동 19통 통장을 구합니다' 현수막을 걸어두길래 보기 싫다고 걷으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통장을 하시면 제거하겠다고 했다나. 그래서 그녀가 운중동 19통 1대 통장이 되었던게다. 그리고 내가 2대.
처음엔 통장은 시골마을 이장같은 줄 알았다.
동네 궂은 일, 필요한 일은 솔선해서 하고 이웃사람들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는 홍반장같은 존재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가끔 있긴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무원들이 해야할 일을 한번 더 넘겨받아 현장에서 대신 하는 일이 많다.
혹시 통장이 되고 싶은 이가 있을까봐 좀 자세히 적어본다.
1. 매월 2회의 정기회의와 임시회의를 한다. 여기서는 행정주요사항을 전달받아 자신이 맡은 통의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거나 주민들의 의견을 받는 역할을 한다.
2. 전입신고를 한 집을 방문해 실제 거주하는 지를 점검한다.
3.정기적으로 지역을 돌며 환경미화활동을 한다.
4.주민센터의 각종 조사및 통지활동을 대행한다. 주민등록사실조사, 민방위훈련참여통지 등
5.지역사회의 주요 행사에 참여하고 주민동원에 앞장선다. 체육대회, 불우이웃돕기행사, 선거, 야유회 등등
이외에도 많은 소소한 일들을 한다.
통장은 행정부의 모세혈관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요하고 많은 일을 하는 데 무보수는 절대 아니다.
처음 통장이 되었을 땐 월 30만원, 지금은 월 40만원의 통장 활동비가 나온다.
큰 돈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하는 일이 많은 것에 대한 격려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이걸 홀라당 쓰는 것이 아까운 통장들은 적금을 둔다.
수고한 자신에게 상을 주듯, 그 돈으로 여행을 가거나 좋은 선물을 해준다.
이쯤에서 글을 접으면 통장일이 좋았구나 이걸로 결론이 날 것 같다.
이제 햇수로 6년차에 접어드니 실은 시원함보다 아쉬움이 더 많이 남지만 아픔이 없진 않았다.
처음 통장을 한다고 하니 내 주위에 나를 좀 안다는 이들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뭐 그것까지 하고 그래?
안그래도 자존감이 심해수준으로 가라앉은 나에게 참 잔인한 반응들을 보였다.
-응! 이제 지역사회에 봉사 좀 해야지.
봉사라는 말이 나를 버티게 했다. 마치 내가 많이 가져서 나눠주는 것처럼 보이니깐.
현장도 녹록치않았다.
한번도 끼어보지못한 전업주부들의 현장에 들어온 것이 너무 어색했다. 그것도 다양한 연령에 다양한 통장연차를 가진 이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처음엔 적응이 안됐다. 어느 조직이든 아웃사이더가 안될려면 동료그룹을 만들어야 한다. 나 또한 비슷한 또래와 엮이고 나서야 물에 기름도는 듯한 어색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저 주부가 아니었다. 면면이 모두 이력이 화려했다. 가까이서 겪어보니 삶의 내공이 다들 어마했다.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은 서판교 1세대였다. 어마어마한 경쟁율을 뚫고 판교로 당당히 입성한 이들이었다. 뒤늦게 이곳에 집을 지어 들어온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돈벼락을 제대로 맞은 이들이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변변하게 없이 부부가 열심히 일해 어쩌다 판교에 집짓고 사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이들도 많았다. 재수 좋아 분양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잘 사는 이들이 참 많은 곳이다. 특히나 내가 맡은 주택가는 더 그랬다.
솔직히 가끔은 주민센터에서 내려온 심부름을 하러 주택가를 돌 때면 급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심부름 온 사람취급을 하거나 문전박대를 하는 무례한 사람을 만날 때, 춥고 더운 계절에 가가호호 방문을 해야했을 때 갑자기 쑥 올라오는 우울함이 있었다.
'지금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거지?'
그럴 때면 남편이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이 남편이었으니.
몇 차례의 슬럼프가 지나갔지만 나는 이제 곧 운중동 19통 통장 6년을 마무리한다.
원래는 임기가 3년인데 다른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3년을 더 할 수 있다.
그래서 6년을 했다.
세월이 참 빠르다. 현수막을 보고 면접을 본 것이 얼마전 같은데 6년이라니.
이제 안한다고 생각하니 시원함보다 아쉬움이 크다.
매달 통장수고비도 안들어오겠지.
남편은 봉사라고 생각하고 하라고 했지만 난 매달주는 통장수고비의 무게가 컸다.
통장은 반은 공무원 반은 민간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는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삶이었다.
세금으로 주는 것이니 받는 마음도 무거웠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6년을 달려왔는데 나로 인해 운중동 19통은 무엇이 좋아졌을까?
부끄럽게도 그 질문엔 고개가 숙여진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좀 더 적극적인 통장역할을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얼마 안남은 임기동안은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잘 듣고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답고 따뜻한 운중동 19통이 되도록 더 열심히 뛰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