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의 감사
'난 아직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데......'
겸손이 어려운 성격이다. 이쯤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좀 더 냉정한 평가가 나올만도 한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 스스로가 내리는 자평은 늘 무한긍정이다. 내 안에 돈키호테가 있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그 성격 덕에 발을 디디게 된 곳이 네이버 지식인서비스다.
보건의료분야에 대한 상담이 가능하리라 보고 그 영역을 먼저 타진해보았다. 그런데 이미 각 진료과별로 상담의들이 포진해있었다. 그건 의사뿐 아니라 약사,한의사,치과의사 등 전문가영역은 모두가 그랬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빈 공간을 파고 들었다.
요양,간병,병원선택고민 등 의사가 답하기엔 수익과 연계점이 없는 영역들, 정해진 정보가 없어 좀 더 노력을 보태야 도움이 되는 답을 구할 수 있는 영역들이 제법 많았다.
가장 고민하는 영역이 병원선택이다.
뇌졸중급성기를 치르고 재활병원을 가야할 지, 집으로 가야할 지 고민하는 이에서 몸에 생긴 작은 이상으로 어느 병원(과)으로 가야할 지 갈등하는 이까지 다양하다. 이 정도 질문은 딱히 고도의 전문성이 없어도 공감하는 마음만 있으면 답을 달아줄 수 있다. 한번으로 만족할만한 답을 줄 수 없을 땐 2,3차 질문을 통해 최선의 답을 제공한다.
조금씩 마음을 다해 답을 달아주다보니 난 벌써 초인이 되었다. 좀 더 노력하면 신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가끔 이 곳에 답을 달면서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이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을까?
내가 답을 하는 이들은 나만큼의 진정성을 갖고 질문을 한 것일까?
나의 답은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다소 냉소적인 답이 돌아올 질문들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면서 계속 지식인에 답을 다는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이렇게 가끔 불현 듯 올라오는 갈증에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선물해 준 이가 있었다.
그는 나의 답변에 감사하다는 짧은 글과 함께 선물'1000원'을 보내주었다.
때론 메아리없는 공간에서 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냐며 자책하던 나에게,
애써 쌓아올린 글들이 읽히지 않은 채 묻혀져가는 것에 실망하던 나에게 나의 선의가 가치있음을 알려준 따뜻한 호의였다.
응급실에 근무할 때였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른들은 퇴원하며 꼭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하셨다. 치마 속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지폐를 손에 꼭 쥐어주며 시원한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하셨다. 대부분 몇 천원에 불과한 돈이었지만 애써 주고 가는 할머니의 마음이 고마워서 감사하다며 받아쥐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병동친구들과 달리 근무시간 내내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뛰어다니던 응급실 근무에서 나를 좌초시키지 않게 한 힘이었다.
익명의 사람이 보내온 천원이 그랬다.
그것은 나의 초라한 선의에 보낸 따뜻한 위로의 전문이었다.
더이상 나의 지식과 지혜를 노동으로 인정해주려고 하지 않는 세상에서 갈바를 모르고 표류하는 것 같은 절망감이 나를 잠식시킬 그 즈음에 보내온 희망의 신호탄 같았다.
'아직 세상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지식인에 답을 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떠올리며, 내게 보내준 1000원의 감사를 기억하며 정성을 다해 응답한다.
'지금 듣고 있나요?'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 에밀리 디킨슨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