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것들을 닦고 사는 법

20250412

by 최목필

키보드를 분리해서 닦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까지 겉에 묻은 먼지나 좀 닦는 정도로 청소했는데, 그거로는 부족하다며 화면 속 유튜버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다. 키캡을 다 분리한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키보드를 툭, 툭 털자 속눈썹, 머리카락, 알 수 없는 각질과 마른 음식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진다.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내 기계식 키보드를 유심히 바라본다. 틈을 노려보니 정말로 검고 누런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다. 구멍마다 딱 맞는 키캡들이 합체된 이 물건에 대체 왜 먼지가 쌓이는 것인가? 그나저나, 이렇게 내 키보드를 유심히 본 건 처음이다. 매번 손가락만 분주히 놀리지, 시선은 언제나 노트북 화면을 향하니 말이다. 어쩐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유독 닳아버린 키 몇 개를 만지작거린다. 표면이 매끈하다.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 대청소를 시작한다. 키캡 분리 도구는 왠지 사기 싫다. 대신 굴러다니던 실핀을 덥석 집어 스페이스 바와 알트키 사이에 벌어진 틈에 쑤셔 넣고 천천히 힘을 준다. 툭. 제 자리를 벗어난 스페이스 바는 밋밋하고 볼품없었지만, 그래서 쾌감을 느낀다. 나는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을 보여 그것들을 하나, 하나 분리한다. 순식간에 키보드의 이가 전부 빠진다.

세탁실에서 청소용으로 쓰던 작은 대야를 찾아 키캡들을 넣고 따뜻한 물과 세제 두 방울을 넣어 때를 불린다. 손으로 휘저으니 가벼운 조약돌이 부딪히는 거 같은 소리가 들린다. 잠시 기다렸다가 깨끗한 물로 헹구고 수건에 담아 햇빛이 강하게 드는 베란다 창가로 향한다. 수건 안에서 키캡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물기를 뺀다. 생각보다 안에 물기가 많이 남아 하나, 하나 털어 마르기 좋은 방향으로 뒤집는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초봄, 아직 차가운 장판 바닥에 발가락이 움츠러든다.

문득 삶이란 게 얼마나 지독하고 고루한지 생각한다. 처음으로 제집을 잃고 혼란스럽게 뒹구는 키캡들을 닦으며 잊고 있던 중력의 무게를 떠올린다. 냉기를 느끼는 발바닥이 무색하게 베란다를 침범하는 햇빛이 어딘가 익숙하다. 내가 울며 겨우 보낸 작년 초여름에도, 재작년 봄에도 만난 그 햇빛인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키보드를 닦게 될까.

키캡을 말리는 동안 앙상해진 판을 본격적으로 청소한다. 키보드 바로 앞에서 과자를 먹은 적도 없는데 정체 모를 가루가 수북하다. 속눈썹도 생각보다 많다. 소독약을 묻힌 면봉으로 틈새를 꼼꼼히 닦는다. 키보드를 치다가 눈을 긁는 바람에 떨어진 속눈썹이 이 좁은 틈으로 떨어질 확률은 얼마지? 하얀 면봉이 금세 검게 변한다.

이번엔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처럼 꽂혀 있던 책들을 전부 빼서 바닥과 책상 위에 쌓는다. 청소용 물티슈로 빈 책장을 쓸자 숨어있던 묵은 때가 마구 묻어 나온다. 먼지는 아무 데서나 다 온다. 네가 숨만 쉬어도 쌓이는 게 먼지야. 건조한 엄마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숨만 쉬어도 무언가 쌓인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내가 물었다. 살아 있어서 돈을 내고 기꺼이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책들이 몸을 겹쳐 쌓인 채로 나를 공허하게 바라본다. 그중에서 숨조차 쉴 수 없이 버겁던 날, 나를 살려낸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명치가 따끔해져서 그들의 집을 더욱 열심히 닦는다.

숨을 쉰다는 건 품이 참 많이 드는 일이다.

엉망으로 말린 요가 매트를 다시 펼쳐 깔끔하게 말아 접는다. 듬성듬성 갈린 자국을 보니 곧 구멍이 날 거 같다. 우리 집 강아지 발톱에도, 내 무릎과 엄마의 실내 운동화에도 기꺼이 갈린 나의 요가 매트. 간혹 펼치기만 해도 부스러기들이 떨어질 때가 있다. 버릴 때가 됐는데, 어쩐지 여러 자국에 마음이 가서 반절로 잘릴 때까지 쓸 생각이다.

요가를 시작한 지 꽤 오래됐다. 나는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몸이란 게 얼마나 쉽게 닳는지 깨달았다. 예뻐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을 거 같아서 요가원으로 향한다. 요가원을 채우는 물건들로 이곳의 분위기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선호하는 곳엔 주로 싱잉볼이 있고 인센스 홀더가 입구부터 수련하는 곳까지 구석, 구석 잘 비치되어 있다. 인도나 제주도에서 사 왔을 거 같은 만다라 천 포스터가 문이 열릴 때마다 잔잔히 물결친다. 구석에 보이차를 우릴 수 있는 작은 주전자와 찻잔들까지 모여있으면 완벽하다. 누가 봐도 여긴 ‘요가원’이라는 느낌을 주는 물건들. 쓰다 보니 너무 뻔하다. 개인적인 취향이다. 이런 것들이 나를 좀 더 잘 움직이게 만든다.

이거, 저거 따진 거 치곤 몸은 여전히 초심자라 이국의 언어로 동작을 지시하는 선생님과 옆에서 물 흐르듯 수련하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부지런히 따라 한다. 호흡을 멈추지 마세요.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애처럼 반박한다. 숨 참고 어떻게 운동을 하겠어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 입은 그제야 ‘파-’하고 막힌 숨을 뱉는 것이다. 내가 이런 소리를 내며 숨 쉬는지 몰랐다. 나는 금세 창피해진다.

수련이 끝나고 ‘사바아사나’에 들어가면 모두가 매트에 몸을 뉘고 축 늘어진다. 송장 자세라니. 어쩐지 좋다고 생각한다. 몸이 힘든 날은 선잠이 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수련하는 동안 잠시 미뤄둔 생각들이 달려온다. 아직 반송장이라 그런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선생님의 낮은 음성이 그것들을 무찌른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보다 과거의 영향력 아래에 더 머물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여러분을 지금 괴롭게 만드는 건 과거에 자신이 한 선택이기도 하니까요. 과거의 생각과 행동들이 카르마로, 혹은 아사나로 쌓입니다. 그것들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 해보는 건 어떨까요? 과거는 선택할 수 없지만, 우리의 기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내 선택으로 머문 자리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 함께 수련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사용한 매트를 깨끗이 닦는다. 내 업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정리하고 절반 정도 후련히 떠난다. 남은 절반은 어디에 묻었으려나. 어차피 돌아와서 수련하면 또 닦아야 할 테니, 그건 다음에 생각하기로 한다.

운동과 청소의 공통점은 다 해내고 나면 무조건 배가 고프단 거다. 숨을 열심히 들이마시고 내쉰 대가를 찾는 양 몸이 음식을 부른다. 나는 곧잘 명령에 따라 냉장고를 뒤적인다. 야채칸을 보면 내 한주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텅텅 비었다면 이번 주는 엉망으로 먹고살았다는 뜻이다. 알아차렸더니 속이 부대낀다. 냉동 야채까지 탈탈 털어서 소고기를 넣고 수프를 끓인다. 이것으로 내 몸에 심심한 위로를 표하는 꼼수를 부린다. 국자로 불순물을 건져낸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불순물을 걷어내는 어른이 됐다. 철저히 엄마를 따라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음식점에서 탕이가 찌개의 유독 빨갛고 검게 끓어오른 거품을 걷어내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불순물이야.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가 더 한쪽으로 기운다. 다 때려 넣고 끓이는데, 왜 그 거품만 불순물이야? 양념이 몰리니 더 맛있는 거 아냐? 애초에 한 번 손질해서 요리하는데, 불순물이 왜 나와? 내가 집요하게 물으면 엄마는 작게 웃으며 말한다. 그냥, 불순물이니까.

보글보글 올라오는 고기 기름과 찌꺼기를 걷어낸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그냥 따라 했을까?

밥을 먹을 때 여러 접시를 꺼내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수프나 비빔밥처럼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끼니를 선호한다. 자연스럽게 반찬도 잘 안 먹는다. 종지 그릇이라도 3개가 넘어가면 어쩐지 부담된다. 저 그릇을 굳이 꺼내 반찬을 담았으니, 닦는 게 아깝지 않으려면 한 젓가락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부채감에 시달린다.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지만, 괜히 눈치가 보인다. 하다 하다 그릇 눈치까지 보다니. 오늘은 한 그릇에 전부 담았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먹는다.

게눈 감추듯 먹으니 그제야 습관처럼 고른 그릇이 어떤 건지 보인다. 엄마가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국그릇이다. 이 국그릇은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 집 부엌에 머물렀다. 저 그릇에 담아 먹은 탕국이 기억난다. 아주 어릴 적, 명절과 제사마다 부지런히 식탁 위를 돌며 누군가의 식사를 묵묵히 담아낸 푸짐한 국그릇. 그릇이라는 건 무언갈 품은 만큼 닦여야 하는 존재다. 표면을 살짝 만져본다. 어쩐지 예전보다 얇아진 느낌이다.

얘는 우리 할아버지도 기억할 테지.

때론 시각보단 후각과 촉각이 훨씬 오래 남는다. 그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낯을 많이 가렸던 나는 그런 환대가 자주 어색했다. 어느 날, 집안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어뒀더니 어른 손바닥만 한 사마귀가 날아 들어와 거실을 무자비하게 훑었다. 겁이 많던 나는 비명을 지르며 가장 가까운 어른의 품에 파고들었다. 손에 잡히던 바람막이 점퍼에 얼굴을 묻자 남성용 스킨 냄새와 섞인 옅은 담배 향이 났다. 너무 무서워서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내 등을 감싸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괜찮다는 듯 연신 토닥거렸다.

그는 뇌종양 선고를 받고도 1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끝까지 담배와 술을 손에 놓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가슴을 칠 일이지만, 나는 이상하게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는 게 싫지 않다. 그의 살과 옷에 묻는 향긋한 담배 냄새만 이따금 코끝을 스쳤다.

성인이 되자 주변에 흡연하는 친구들이 늘었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같은 향의 담배는 찾지 못했다. 코를 씰룩이는 걸 포기하고 하얗고 얇은 막대에 의존해 숨 쉬는 그들을 바라본다. 가라앉은 침전물처럼 굳어 있던 얼굴들이 잠시 펴지는 순간. 명백하게 생명을 갉아먹는 존재를 입에 물고 ‘이제 좀 살겠다’라는 표정이 의아하다. 저것도 요가 선생님이 말한 호흡이라 할 수 있을까?

물을 세차게 튼다. 국그릇에 기름때가 남지 않도록 박박 닦는다. 사람이 살려면 하루에 식사를 세끼, 못해도 다섯 끼는 먹는데 매번 이렇게 닦아야 한다니.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남몰래 한 번도 닦지 않아서 기름이 잔뜩 껴 그릇이 점점 두꺼워지는 지저분한 상상을 해본다.

밥을 먹고 간식을 먹는 버릇은 여전히 못 고쳤다. 괜히 냉장고를 열어 기웃거리다가 절반 남은 케이크를 발견한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통째로 묵묵히 퍼먹는다. 그다지 맛은 없다. 크림이 묻은 포크를 경망스럽게 쭙, 쭙 소리를 내며 빤다. 이따금 나도 모르게 혀까지 빼내어 아이스크림을 먹듯 핥을 때가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순간마다 검은 화면으로 바뀐다. 눈치 없는 TV. 눈치 없는 드라마. 반성 없는 나.

할머니네 국그릇처럼, 우리 집에도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포크가 있었다.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남색 체크 무늬 손잡이였고, 다른 하나는 분홍색 체크 무늬 손잡이였다. 거의 10년 넘게 썼을 거다. 나는 남색을 더 자주 썼다. 그 포크에는 꼭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꽂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빵집, 먹고 싶다고 한 떡꼬치, 선물로 받은 과일. 누군가의 관심이 부지런히 꽂혀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를 이루었다. 자연스럽게 그 포크를 쥐고, 퍼먹고, 핥았다. 내 혀에 깎이고 깎여서 표면의 5% 정도는 먹은 거 같다.

대략 3년 전, 결국 그 포크는 손잡이가 나가떨어져서 버려야만 했다. 붙여서 쓰고 싶다고 엄마에게 우겼다가 크게 혼이 났다. 오랜 소꿉친구를 잃은 것처럼 어찌나 아쉽던지. 근데 이건 내 마음이고, 걔는 후련했을지도 모르겠다. 쓰레기통에 던져지면서 ‘드디어 해방이다!’하고 외쳤을까?

우리는 우리가 물건을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우리로부터 도망가는 걸지도 모른다.

배를 채우고 다시 전쟁통이 된 내 방으로 돌아온다. 이번엔 옷장을 연다. 서로 뒤엉켜 구분하기 힘들었던 옷들을 하나씩 정리하니 새삼 많다.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의문이 내게도 찾아온다. 이렇게 옷이 많은데, 왜 매일 아침 입을 건 없을까?

물건들은 창피당할 일이 없다. 그걸 쓰고, 입는 우리가 창피를 당하는 거지. 그런 걸 보면 가끔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얘네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특히 옷이 더 그렇다. 과도하게 꽉 끼는 청바지, 예뻐서 샀지만 불필요한 노출이 불편해서 손이 안 가는 오프 숄더,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입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티셔츠까지. 남들 시선을 의식하며 출처 없는 고양감을 만끽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남들보다 많은 걸 기억하는 건 저주다. 내 과거를 기억하는 녀석들을 당장 치워버리고 싶다가도, 어렵게 번 돈으로 몇 달을 기다렸다가 산 기억이 모조리 버리려는 내 손을 막는다. 혹시 또 몰라. 이걸 꺼내 입게 될 날이 올지도. 얘는 잠옷으로라도 입자. 이런 식으로 미련함이 또 먼지처럼 쌓인다.

정말 보내줘야 할 옷들을 골라 옆에 쌓아둔다. 코가 간지러워 연신 재채기한다.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주제에 숨 쉬듯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얘네들은 이제 분해되고 태워져 내가 사는 이 행성을 굉장히 아프게 할 테지. 죄인처럼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도둑처럼 분리수거장으로 향한다. 다 돌려받게 될 거다. 속에서 저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버리는 순간마저 고개를 뻣뻣이 들 만큼 양심이 없지 않다.

계속 청소할수록 자꾸 쑥스러워진다.

정리 상자를 열었더니 오래된 편지들이 보인다. 말이 좋아 정리 상자지, 그냥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한 곳에 쑤셔 넣었을 뿐이다. 이런 건 정리라고 할 수 없다. 오래된 종이가 건조한 손과 만나 버석거린다. 남몰래 속으로 싫어했던 이가 써준 편지를 읽어본다. 왜 이런 귀한 마음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느껴지는 걸까. 답장을 쓰듯 원래 모양을 기억해 천천히 접어 정리한다. 이번엔, 나도 온 마음을 다해서.

이불을 탈탈 털어 정리하고 종일 부산을 떠느라 바닥에 또 쌓였을 먼지를 가볍게 쓴다.

그놈의 먼지. 먼지. 먼지가 뭔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할 유머로 이 모든 행위가 의미 있다고 나를 속인다. 최대한 팔을 뻗어 청소기를 구석까지 밀어 넣는다. 평소엔 신경 쓰지 못한 곳에 안부를 묻듯이. 똑똑. 괜찮으신가요? 좀 살만하십니까? 예? 방 주인이 너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고요? 미안합니다. 제가 잘 얘기해보겠습니다. 거짓말이 능숙한 부동산 사장처럼 어르고 달랜다.

물걸레질은 청소기보다 훨씬 어렵다. 단순히 벅벅 닦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물은 자국이 남는다. 꼭 침이랑 눈물 같다. 균일한 힘을 주어 섬세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흘린 길이 그대로 보인다. 그것도 가장 밝은 빛이 들어올 때 말이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지나온 길에 딱 겹치도록 걸레질한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매번 깨닫는다.

해가 서서히 진다. 베란다로 가서 키캡들이 다 말랐는지 확인한다.

키보드를 해체하기 전에 미리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 원래 하나였던 것들이 흩어져서 책상 위를 굴러다니니 낯설기 짝이 없다. 더듬거리며 숫자부터 끼운다. 아직도 빈 곳이 많이 남았는데, 키캡 수가 부족해 보여서 속이 탄다. 마지막 스페이스 바까지 끼우고 나서야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모든 청소가 끝났는데, 어쩐지 기분이 썩 별로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거 같다.

배고파서 또 밥을 먹는다. 이번에는 할머니 집 국그릇이 아닌 다른 그릇을 고른다. 쟤도 좀 쉬어야지.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한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아무렇게나 운동화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간다. 밤엔 아직 쌀쌀하긴 해도 산책할 만한 날씨다. 이미 아는 길을 걷는다. 낡은 운동화가 ‘지겨운 놈’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걷고 있는 ‘나’는 매번 다름으로, 이건 명백히 다른 길이다.

저주받은 기억력이 이 길을 걸었던 과거의 나를 불러온다. 그땐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서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걸었더라. 잊은 걸 보니 별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같은 나무 아래 다른 내가 서 있다. 못 보던 새 가지가 났다. 주변의 굵고 두툼한 가지들 틈에서 꽃줄기 같은 잔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쟤는 그냥 때가 되고 자리에 계속 있어서 자랐을 뿐인데, 어쩐지 내 기분이 갠다.

무게 없이 일렁이는 간사한 마음에 빌붙어 산다.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 툭 친다. 같은 길이라고 해도 다르지? 그나저나, 운동화가 이렇게 더러워진 줄 몰랐다. 조만간 너도 세탁해줄게. 또 날이 좋은 날을 골라서.

집으로 돌아와 샤워한 뒤 가볍게 머리를 말리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동안 다시 키보드를 훑어본다. 부침개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이 울렁거려서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살짝 쓸어본다. 그래, 분명 깨끗해졌다. 어차피 또 더러워질 거란 마음은 일단 치워버리고 절반쯤 새 마음으로 손가락을 세워 익숙한 자리에 올린다. 종일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누르며 이야기를 쓴다. 어쩌면 무의미할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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