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귀찮은 세상 모든 케르베로스를 위하여
첨지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 H를 찾아서 깨우는 일이다. 쿵쾅쿵쾅 아이들의 침실로 걸어가 H를 사정없이 흔든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자고 있냐고 거친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베개 밑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는지 뒤져본다. 이번에는 어젯밤에 동생과 거래한 스티커와 볼펜이다. 이런 물건을 대체 왜 침대에 놓고 자는 거냐, 치워버리겠다고 으름장도 놓는다. H는 엄마의 말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나, 밤새 잠을 아껴가며 모아놓은 볼펜들을 치우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치우지 말라고, 밤에 다른 사람이 내 볼펜을 쓸까 걱정되서 여기에 숨겨둔 건데 그걸 왜 치우냐며 큰소리로 대꾸한다. 하지만 잠자리에서 절대 일어나지는 않는다.
첨지가 두 번째로 하는 일은 H를 감시하는 일이다. 아침 식사를 제대로 먹고 있는지 체크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H가 소시지나 흰 식빵만 먹는 것처럼 보이면 첨지는 주변을 배회하다 순식간에 달라붙어 삶은 계란을 H의 입 안에 욱여넣는다. 계절에 맞는 옷을 잘 챙겨 입었는지 감시하는 것도 놓칠 수 없다. 겨울에 여름 바지를 입고 나가려던 것을 막아세운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염없이 머리를 빗느라 오전 약을 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는 일마다 태클을 당하니 H의 짜증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도 첨지는 멈추지 않는다. 본인의 철저한 감시 하에 H가 비로소 등교할 수 있다고 믿는다.
H가 무사히 학교에 도착한 뒤에도 첨지의 감시과 간섭은 계속 된다. H가 남긴 아침 식사를 분석하며 내일은 이런저런 메뉴를 추가해야겠다고 리스트를 짠다. H의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며 ‘어제는 이런 낙서를 했군, 이 문제집에서는 이 부분에서 딴 생각을 했군,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공부를 시켜야겠군.’ 따위의 판단을 내린다. H에 관한 모든 것을 톺아보고 가까운 미래, 먼 미래까지 모두 계획을 세우고 있으면 어느덧 하교 시간이 된다. 그러면 이제 “집에 왔으면 손부터 씻어라. 옷을 벗었으면 깨끗하게 개어놔라. 조금만 쉬었다가 학원가라. 지금 유튜브는 보지 마라.” 잔소리를 시작한다.
“학교에서 점심은 제대로 먹고 왔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H가 쌓인 것이 많은 눈빛으로 첨지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게 왜 궁금한데?” 되묻는 것이었다. 날이 제대로 선 목소리에 첨지는 깜짝 놀랐다. H는 차가운 한숨을 쉬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심지어는 문도 닫았다. 첨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뭘 어쨌다고? 저렇게 싸가지없이 대답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문을 콱 닫다니, 아직 사춘기도 아니면서. 괘씸해서 방문을 따고 들어가 호되게 혼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H가 케르베로스가 되어버리면 안 될 일이었다.
첨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2시가 넘은 오후임에도 커피를 한 잔 내렸다. 겨울이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정했다. 차가운 커피로 뜨거운 머리를 식히며 아까의 언행을 복기해봤다. 그리고.. 한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 첨지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온통 H의 잘못만 들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애써 얻어낸 물건을 자면서도 간직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아침에 퍽퍽한 계란 노른자보다 흰 빵이 더 맛있었을 수도 있지. 겨울 바지가 까끌거려서 매끄러운 가을 바지를 입고 싶었을 수도 있지! 한 발 뒤로 물러서 바라보면 이해해줄 수도 있는 문제들이었다.
점심은 먹었니 어쩌니 하며 캐묻지 않아도 H는 이미 본인의 세 머리들을 이끌고 학교 생활을 하느라 지쳐있던 터였다. 첨지는 H를 통제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행여 H가 케르베로스로 변해 밖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H에게 스트레스 가득한 환경을 제공했다. 마치 여주인공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집착하는 통제광 남주인공과 같았다. 그런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몹시 미워한다. 지금 H처럼 말이다. 첨지는 문득 자신이 집착광공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후 H의 방문이 열렸다. 첨지에게 가려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였다. 첨지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H의 눈치를 봤다. H도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첨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뗐다. “엄마, 우유 있어? 코코아 마시고 싶어.” 그렇다. H는 첨지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았다. 기회는 이때였다. 원하는 것을 말하면 바로 얻어낼 수 있는 때. 첨지는 전광석화처럼 일어나 코코아를 말았다. H가 환장하는 마쉬멜로도 가득 담아냈다.
합격이었다. H는 엄지척을 해주었다. 오늘은 이렇게 용서를 얻었다. 첨지는 다짐했다. 다시는 통제하고 간섭하지 않으리. H가 얇은 바지를 입고 싶다면 내버려두리. 베개 밑에 어떤 물건을 숨기고 잠든다 해도 신경쓰지 않으리. H가 스스로 실수를 느끼고 최선의 방법을 찾을 때까지 끼어들지 않으리.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저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