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도인가 지옥도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우리의 여행이 아작난 건 장소때문이 아니다

by 최첨지

2025년에는 괄목할만한 행사가 있었다. 첨지네 결혼 10주년이 그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년 간 첨지도, H도, 남편 L도, 마지막에 합류한 둘째 J까지도 모두 정신없이 달렸다. 오랫동안 혼자였던 사람 둘이 만나 새 삶의 형태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여기에 아이들이 연거푸 태어나고, 기저귀를 떼고, 누군가는 케르베로스임이 밝혀지고, 이 모든 것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여 그동안은 특별히 기념일이랍시고 조각 케이크라도 하나 사서 먹을 여유가 없었단 말이다. 문득 뒤돌아보니 벌써 10년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모래성은 어찌나 허물어지기 쉬운지. 간신히 쌓아올렸건만 입김만 닿아도 벽이 부스러졌다. 첨지와 남편 L이 다투기라도 하면 한쪽 벽이 허물어지고, H의 케르베로스 진단으로 다른 벽이 허물어졌다. 허술한 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면 J와 H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첨지와 남편 L은 거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모래성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첨지는 조금 낡았다. 서슬이 시퍼렇던 눈빛이 동태눈깔과 진배없어졌고, 몇 날 밤을 새도 멀쩡하던 체력이 흐물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남편 L이었다.


L은 고심하더니 한 가지 묘책을 내었다. 가족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무려 괌이었다. 가족 모두가 깜짝 놀랐다. 특히 첨지는 설레기까지 했다. 신혼여행 후 첫 해외였기 때문이다. 낡은 여권을 갱신하고 첫 도장을 찍을 생각을 하니 다시 젊어지는 것 같았다. H와 J에게는 여행 전 주까지 절대 비밀이었다. 여기저기 자랑하며 다닐 것은 물론이고, 마음이 붕떠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것이 염려되어서였다.


여행 전날, 첨지는 짐을 싸며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H에게 정신과 약을 얼마나 먹이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약의 양이 줄어들면 H는 조금 더 자유로워지지만 언제 어디서 케르베로스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양이 늘어나면 여행 시 발생하는 변수들에 더 잘 수긍할 수 있겠지만, 대신 여행을 만끽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첨지는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냥 약을 죄다 준비하기로 했다.


당일 아침, 인천공항에서부터 시작이 순조로웠다. 남편 L이 발 빠르게 모든 것을 준비한 덕이었다. 첨지는 살짝 긴장했고, H와 J는 흥이 올라왔다. 그렇게 비행기 탑승까지 일사천리였다. 2시간쯤 지났을까, 둘째 J가 먼저 발동을 걸었다. “엄마, 언제 도착해? 나 심심한데.” H도 거들었다. “그리고 배고파.” 아이들은 지금 타고 있는 것이 비행기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했다. 밖에는 편의점도 없고, 지금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걸 설명해줘도 질문은 다시 돌아왔다. 첨지는 아주 조금 다이빙하고 싶었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다들 몹시 지쳤다. 그래도 J는 해외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상기되었다. 반면 H는 괌의 온도, 습도에 불쾌지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피곤한데 이불이 꿉꿉하다는 것을 이유로 잠들기를 거부했다. 첨지는 10년만의 해외여행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써 H를 달랬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자. 배 타러 가서 돌고래 보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조금 불편해도 오늘은 이만 자자. 알았지?”


첫날 아침, 첨지는 H에게 약을 조금만 먹이기로 했다. 돌고래 투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케르베로스의 세 개의 입이 음식을 와구와구 먹어주길 바랐다. 여섯 개의 눈알로 멋진 풍경을 마음껏 담길 바랐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아침 기상과 동시에 튀어나온 케르베로스는 경계심이 극에 달해 그 어떤 이벤트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배를 타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배 안에서도, 돌고래 무리를 발견하고서도, 케르베로스는 불편함을 호소하며 폭주했다. 내내 시달린 첨지가 오후에는 호텔에 머무르자고 선언했다. 남편 L이 호텔 수영장에서 노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심산이었다. 실패했다. 케르베로스는 수영장에 발가락 하나도 담그지 않았다.


첨지는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여태껏 휴일에는 식욕을 고려하여 약의 용량을 낮췄었다. 일주일 중 이틀만큼은 약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고자하는 의지도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모든 면에서 잘해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안에서의 규칙이었다. 완전히 낯선 공간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약효가 바싹 오른 것이 보탬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첨지는 H에게 약을 정량대로 꼬박꼬박 먹였다. 마치 공기대회를 준비하던 것과 같은 긴장된 마음가짐이었다.


그 계산은 적중했다. H는 자신 안의 케르베로스와 잘 타협했다. 즐겁게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전통무용 디너쇼도, 바닷가에서의 산책도 아름다웠다. H의 두 눈이 고운 모래알을 담았다. 하나의 두뇌가 안정을 찾는 것이 보였다. 호텔 수영장에서 지칠 때까지 수영을 하고, 현지인들만 간다는 타코집에서 특선메뉴를 맛있게 먹었다. 첨지는 그제야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남편 L도, 둘째 J도 행복해했다.


그렇게 첨지네의 첫 해외여행이 막을 내렸다. 남편 L의 기획은 첨지에게 잘 먹혔다. 물론 힘들고, 고되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첨지는 H와 둘째 J가 함께 바다에서 노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첨지의 눈에 아주 조금 생기가 돌았다. 여행이 주는 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오, 하지만 카드값은 아름답지 못했다. 과자 2개에 음료수 하나 값이 만 칠천원이라는 사실을 안 그 후부터 첨지는 또 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환율이 케르베로스보다 무서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음을 부르는 3학년 3반 공기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