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농부는 CEO다 <1>-

나는 농부다

by 최담

모든 농부는 CEO다. 일터인 맞춤한 크기의 논과 밭은 사업장이고 공장이다. 심고 가꾸는 작물은 업종이고,

몇 주나 몇 개를 심었는가는 고용한 직원의 숫자다. 1천 평의 과수원에 사과나무 500주를 심어 가꾸고 있다면, 공장 부지 1천 평에 사과를 주 업종으로 500명의 생산직 직원이 있는 어엿한 중견기업의 오너이다.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 특별한 방법으로 입사했다. 회사 로고가 크게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것도 마냥 좋았다. 쉬는 날 없이 밤낮으로 일했다. 전임자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업무가 산더미였다. 오직 회사의 발전과 좋은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거래처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쌓여 있는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했다.

1년 후 돌아온 인사고과는 부서 내 최하위! 평소 열심히 일하던 모습을 지켜봤던 인사담당 직원이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살짝 알려줘 알게 됐다. 심지어 거래처를 방문하고 나오면 감사과 직원이 뒷조사까지 했다.


충격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한 개인의 생사여탈권은 윗사람들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 허탈하고 무력했다. 부속품 그 자체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바라본 상사들의 퀭한 몰골과 긴장되고 불안한 눈빛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마주할 거울이었다.


결심했다. 그토록 일하고 싶었던 회사였지만 보인 현실은 한 개인이 견뎌내고 헤쳐나가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겨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때부터였다. 차라리 내가 회사를 차리자.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직원들이 일요일 저녁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을 기다리며 잠들 수 있는 회사를 꿈꿨다. 퇴사하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어차피 그만둘 거지만, 아직 뭘 해야 될지 찾지 못한 상황에서 기본만 하며 다니자 생각하니 버틸만했다. 얼마 후,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과감히 사표를 냈다. 모두가 놀랐지만 당당하고 거침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1997년 봄이었다. 창업을 하고 혼자 시작했지만 머지않아 직원 세명의 작은 사업체가 되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일하고 토요일엔 격주로 돌아가며 쉬었다. 월요일 출근해서는 극장에 가서 조조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한 주를 시작했다. 어렵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야무지게 커 나가고 있었다.


사업이 안정돼 갈 즈음 새로운 방향의 전환과 발전을 모색하며 아이템을 찾고 있을 때 대학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석류를 원료로 기능성음료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 중인데 역량이 부족하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제조업을 하며 직원들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회사를 향한 꿈이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후배의 제안을 검토하고 공장까지 둘러본 후 기존의 회사를 접고 직원과 함께 합류하기로 했다. 무모한 결정이었고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을 확인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산시설은 엉망이었고 판매 망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생산과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가지고 있는 전세금마저 빼서 쏟아부었는 데 버텨낼 방법이 없었다. 제조업 경험도 부족하고 자본마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뛰어든 당연한 결과였다.


빠르게 망했다. 하루 종일 빚 독촉에 시달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갈 곳이 없어 주로 한강에 차를 세워 놓고 낮시간을 보냈다. 해가지고 집으로 향하면 환한 얼굴로 맞이해 주는 현명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들, 딸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노숙자가 되지 않은 이유다. 몇 년 동안 부채를 갚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졌다. 희망도 잃어 가고 앞길은 막막했다.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일간신문에 난 광고를 보았다. 예비 귀농인을 위한 '즐거운 귀농 귀촌 학교' 교육생 모집 광고였다. 50세 이후에 꼭 실행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농촌에서의 삶은 오래전부터 꿈꾸고 있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아내에게 광고를 보여주며 교육을 받고 싶다 했더니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귀농 교육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5개월에 걸쳐 100시간의 과정을 이수하며 귀농은 막연한 환상과 탈출구가 아닌 실제적인 삶의 연장이며 치열한 생존의 또 다른 현장임을 생생하게 경험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귀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동의와 귀농 후 무엇을 하며 먹고살 것인가를 선택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사업 실패 후 도시에서의 힘들고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평소에 아내와 농촌 생활과 관련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레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녀들과도 휴일만 되면 발길 닿는 대로 농촌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자연 속에서의 삶을 공유했다. 그 시간들이 어느 순간 귀농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때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 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교육 과정 중에 고민하고 학습한 시간들은 귀농 후 안정적 정착과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자신감도 넘쳤다. 일단 교육만 받아 보자고 했던 선택이 6개월 만에 귀농을 실행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2009년, 도시에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가진 건 거의 없었지만 아무 연고 없는 충북 보은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렇게 1천 평의 사업장과 1천 명의 생산직 직원이 있는 CEO의 시간이 시작 됐다.

당당한 작은 농장의 롤러코스터는 당분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