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by 최단감

1.

McCoy Tyner의 <Soliloquy> 앨범을 듣고 있다. 2번 트랙이 아주 좋다. (https://youtu.be/HAEClng2UMk?si=8eOO2ZFL4SAYwGMe)

이 CD는 ebay에서 중고로 샀다. 거의 한달이 걸려 내게 도착했다. 국제우편 봉투에 찍힌 미국 주소를 들여다보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삶을 상상해본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내가 좀 달라질 수 있을까?


2.

토할 것 같은 나날이다. "토할 것 같다"는 말로밖에 적절히 수식이 되지 않는다.

오늘로 딱 디데이 30일이고, 학원 홈페이지에서는 이제 로스쿨 신입생들을 위한 민법 선행 강좌를 광고하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자리 혹은 차례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3.

법학이 어떤 "계(界)"라면, 그러니까, '세계'를 말할 때의 '계'라면 이 계에 몸담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논문을 발표하고 내 논문이 다른 법학자들의 논문에서 인용될 때 얼마나 즐겁고 짜릿할까 생각해본다. 꿈꾸던 지적 교류.


확실한건, 난 그 계가 법학이 아니래도 좋았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닌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몸에 딱 맞지 않은 계를 입으려 애쓰고 있었고, 다른 옷을 찾기엔 내가 너무 이 옷을 구매할 의사로 시착한지 오래된 것이다. 옷 가게 점원 눈치도 보이고, 내가 이 옷을 입는 과정을 지켜봐준 가족들에게도 면이 없으니 계속 입으려 애써본다.


4.

나를 한계까지 밀어 붙이는 이 경험이 앞으로의 내 삶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한다. 밀고 나가, 지금 더 밀고 나가, 라고 스스로 되풀이해 말하며 판례들과 싸운다. 살면서 꼭 해야 하는 경험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가능하다면 그런 경험들을 피하면서 살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게 내가 지금 포기하지 않고 있는 단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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